초등학교 4학년 현수는 친구들 사이에서 ‘영어 도사’로 통한다. 영어뉴스채널인 CNN을 보면서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서울 모 대학 주최 영어경시대회에서는 2년 연속 대상을 받기도 했다.
CNN 앵커가 되는 것이 꿈인 현수가 틈틈히 준비해 온 것은 토익 토플 등 영어시험이었다. 올해 시험에서 웬만한 대학생도 얻기 힘든 점수를 따 주위를 놀라게 했다. 토플(CBT) 260점, 토익 870점을 받았다. “그냥 영어일기 쓰기나 방송을 보는 것도 좋지만 가끔 제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잖아요.”
초등학교 6학년인 혜윤이는 올해 7월부터 토플 시험을 치르기 시작했다. 혜윤이 역시 영어에 관한 한 누구에 뒤지지 않는다. 이미 10여 차례 각종 경시대회에 출전해 대상만 3번 받았다.
혜윤이가 내로라하는 경시대회 수상 외에도 영어 시험까지 욕심을 내는 것은 바로 외국어고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가고 싶은 외고가 있는데 토플 점수가 높으면 아무래도 유리할 것 같아서요.” 경시대회 응시는 자칫 목표가 없어 흥미를 잃기 쉬운 영어공부에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이고, 영어 시험은 장차 ‘진학’이라는 현실적 고민에서 비롯한 결정이란 얘기다.
초등학생 사이에 토익ㆍ토플 등 각종 영어능력시험 바람이 거세다. ‘초등학생 토익 만점’ 소식도 심심치 않게 언론에 오르내린다. 한때 유학이나 취업 준비생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영어시험이 대입 ‘외국어우수자’ 특별전형을 준비하는 고교생까지 내려오더니, 최근 다시 이들에게까지 번진 것이다. 연령의 하향화가 급속히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시험 열기는 최근 특목고 열풍의 한 현상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최근 외국어고를 비롯한 일부 특목고나 자립형 사립고가 공인영어시험 점수로 입학자격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외고 등의 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초등학생들이 ‘한 발 앞서 준비하겠다’는 의지 표현이 곧 시험응시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2008학년도부터 초등 영어교육이 전 학년으로 실시될 예정인 가운데 조성된 과열 분위기라는 지적도 있다.
올해 서울 대원외고의 경우 토플 260점(CBT), 텝스 850점 이상 맞아야 국제화 전형에 지원할 자격이 생긴다. 한국외대 부속외고(용인외고)도 토플에서 일정 점수 이상(IBT 96점, CBT 243점)을 받아야 ‘영어 우수자’ 전형에 원서를 낼 수 있을 정도다.
영어를 전공한 대학생들도 얻기 쉽지 않은 점수지만, 말 그대로 ‘최소 지원 자격’일 뿐 실제 합격하려면 거의 만점을 받아야 한다는 게 입시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런 추세 속에 초ㆍ중학생을 상대로 ‘눈높이를 낮춘’ 영어 시험이 갈수록 성황이다. 토익 브리지, 제트(JET), 셉트(SEPT) 주니어, 펠트(PELT), 주니어 지텔프(G-TELP) 등 이른바 ‘주니어 영어 시험’이 이에 해당한다.
기본적으로 연령과 학습 수준을 고려한 문제를 풀어 봄으로써 그에 걸맞은 영어 실력을 잴 수 있고 궁극적으로 토익 토플 시험으로 가는 가교 역할을 한다.
한국토익위원회는 “제트 시험을 보는 응시자가 2004년 2만2,327명에서 2005년 5만,538명으로 늘어났다”며 “올해에는 10만 명 이상의 응시자가 생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토익 브리지의 경우 2004년 2만5,613명에서 2005년 4만4,525명으로 응시 인원이 늘었고 올해는 7만 명 정도까지 증가할 전망이다.
최소한 전국 13개 사립 초등학교에서 수준별 수업을 위한 분반 자료, 교내 영어학력 평가용으로 이 시험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니어 영어 시험은 토플 토익 텝스처럼 국가인증을 받은 시험은 아니지만, 대일외고 등 9개 자사고ㆍ특목고 등 일부 학교에선 이 시험을 신입생 반편성이나 영어능력 평가용으로 사용 중이거나 내년부터 사용할 예정이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조기 영어교육에 대한 열기가 지나치게 높다 보니 이런 과열 현상도 나온다”며 “초등 영어교육은 시험을 위한 시험 준비보다는, 영어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없애고 실생활에서의 의사소통 능력을 기르는데 중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원기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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