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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김인숙 장편소설 '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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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김인숙 장편소설 '봉지'

입력
2006.08.04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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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집단적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기(想起)하기가 아니라 일종의 약정(約定)이다.”(‘작가의 말’ 중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시대와 어떤 계약을 맺었는지에 따라 다른 양태를 띠게 마련이다. 김인숙씨의 장편 ‘봉지’(문학사상사 발행ㆍ9,500원)는, 그 약정에서는 자유로웠지만, 10ㆍ26, 12ㆍ12, 5ㆍ18과 같은 숫자에 함몰돼버린 ‘주변인’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때는 강산이 바뀌어도 변치 않던 철권(鐵拳)이 권총 한 자루에 맥없이 스러져간 하수상하던 시절이다.

김봉지. 본명인 ‘봉희’보다 친구가 붙여 준 ‘봉지’라는 별명으로 불리길 좋아했던 여자. 그는 소읍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별로 내세울 것 없어 보이는 존재. 내면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정과 감수성을 담기엔, 봉지를 둘러싼 ‘존재의 껍질’- 가정환경 교육 외모 등- 은 비닐 봉지처럼 얇고 여리다.

1982년 한 간호전문대학에 진학했으니, 십 수 년이 지나 사람들이 붙여준 세대 구분에 따르면, 봉지도 ‘386세대’에 해당될 터. 그러나 그의 관심사는 매캐한 최루탄, 붉은 대자보, 지하실 물고문 등으로 점철된 준엄한 시대 조류에서 한 발짝 비껴 서 있다.

“남들보다 5센티쯤 위 허공을 걸었”던 봉지는 운동권 남자를 가슴 아프게 ‘해바라기’하기도 하고, “남보다 중력이 가벼워, 추락마저 가벼울 듯한”별 볼일 없는 가족과 친구들의 투정과 일탈을 감싸 안으며 세상과 맞닥뜨린다. 비록 “권력 타도”를 외치는 거대한 투쟁은 아니었지만, 존재의 껍질이 찢어질 정도로 몸부림 친 치열한 싸움이었기에, 봉지의 청춘은 푸르거나 봄날 같을 수는 없다.

삼청교육대, 학내 프락치 사건, 미문화원 방화 등 “등록금을 빼 사창가에 바치는 자식은 용서해도 데모하는 자식은 용납할 수 없던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이 봉지의 ‘힘겨운 청춘 버티기’ 군데군데와 오버랩된다. 또, 29만원의 통장 잔고밖에 남기지 못했던 대통령이 매일 9시 뉴스 첫머리를 장식하던 ‘각하의 시대’의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이 능숙하게 그려진다. 유려한 문장과 정확한 디테일 묘사에는, 봉지처럼 63년생인 작가의 고민과 성찰, 회상이 묻어난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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