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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美의 사절서 '팔방미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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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美의 사절서 '팔방미인'으로

입력
2006.08.0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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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가 될래요!”

언제부턴가 이 한마디는 말문이 트인 여자 아이들의 대표적인 꿈 자락이었다. 어른들은 예쁘게 꾸미고 재롱을 부리는 여자 아이에게 최고의 칭찬으로 “미스코리아 감”이라는 덕담을 안겼다. 소녀들에게 미스코리아는 영원한 우상이었다.

이땅에 ‘미스코리아’가 탄생한지 올해로 반세기를 맞았다. 국위 선양을 위한 미(美)의 사절을 뽑기 위해 1957년 시작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명실상부한 한국의 대표미인을 뽑는다는 자부심과 빛나는 전통만은 한결같다.

시작부터 성대했다. 57년 봄 장안 곳곳엔 포스터가 나붙었다. ‘大韓女性(대한여성)의 진선미(眞善美)를 세계(世界)에 자랑할 미스코리아 選拔(선발)’ 전후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볼거리가 없던 시절, 그 소식은 실로 문화 충격이었다.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유교적인 사회분위기가 여전한데도 무려 57명이 신청했다. 그 해 5월 1회 대회가 열린 서울 명동 시립극장은 인산인해였다.

당시 기사(한국일보 57년 5월 20일자)는 ‘7월 11일 미국 롱비치에서 거행될 미스유니버스에 참가할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좌석은 물론 복도에까지 넘쳐 흐르는 수많은 관중과 못 들어가서 앞을 다투는 문밖의 군중들로 인해 일대 혼잡’이라고 기록했다. 첫 미스코리아의 영예는 “금년 23세의 박현옥양”에게 돌아갔다.

이후 미스코리아 대회는 전 국민이 참여하는 한판 ‘축제마당’으로 자리잡았다. 도심에선 성대한 카 퍼레이드 행사까지 열리곤 했다.

초창기 미스코리아는 ‘무관(無官)의 대사(大使)’였다. 국제 교류가 미미했던 터라 미스유니버스 대회 참가는 가난과 전쟁의 비참함만이 알려졌던 우리나라를 해외에 새롭게 알릴 수 있는 절호의 민간 외교 무대였다.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미스코리아 대회는 72년부터 지상파로 중계되면서 위상이 높아졌다. 본선에 진출만 해도 미인 반열에 올랐고, 77년 미스코리아 진 김성희의 가수 데뷔를 시작으로 ‘미스코리아 대회=연예계 등용문’이란 공식도 만들어냈다.

87년 진 장윤정, 88년 진 김성령과 선 김혜리, 89년 진 오현경 선 고현정, 91년 진 이영현 선 염정아, 92년 진 유하영 선 장은영 미 이승연, 93년 진 궁선영, 94년 진 한성주와 미 성현아, 95년 선 최윤영 등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후에도 99년 진 김연주, 2000년 진 김사랑 미 손태영 등이 미스코리아 출신 스타의 계보를 이었고, 배우 장진영 김남주와 신세대 스타 이보영 윤정희 박시연 등도 모두 미스코리아 대회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92년 선 장은영(KBS) 94년 진 한성주(SBS)와 2001년 선 서현진(MBC), 2001년 골든듀 김지혜(PSB), 2005년 진 김주희(SBS) 등 아나운서도 여러 명 탄생했다.

지금까지 배출한 미스코리아는 모두 346명. 이들은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며 한국의 미인사 50년을 장식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50년 여성미의 역사를 쓸 참이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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