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오래 살고 세계를 다 다닌 것은 아니지만, 틈날 때 마다 외유(外遊)를 시도하는 내가 으뜸으로 꼽는 곳은 프랑스의 파리와 한국의 남도다. 향수와 와인의 도시, 명품 패션의 중심지라고 알려져 있는 파리는 막상 가보면 놀랄 만큼 순박하다.
패션 잡지의 쫙 빼 입은 모델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대다수의 시민들은 검소한 옷차림으로 걷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이용한다. 동네 골목마다 보존되어 있는 오래된 성당에서는 매주 실내악 콘서트가 무료로 열리고, 이름난 미술관도 주 1회씩은 할인된 가격이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기회를 누구에게나 준다. 한마디로, 사치하지 않고도 문화적 사치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도시가 파리다.
이처럼 어느 곳이든, 직접 가보지 않고는 그 진가를 알기 어렵다. 얼버무려 알려진, 혹은 여행사의 안내책자를 통한 여행지 정보는 오히려 선입관만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 그 대표적인 예가 나에게는 ‘남도’였다. ‘고추장과 한정식의 고장’, ‘시대의 아픔 속에 개발의 혜택을 덜 받은 곳’ 등의 뭉뚱그려진 묘사는 내가 갖고 있던 남도에 관한 이미지였다.
결혼 후 남도를 유난히 좋아하는 남편의 권유로 처음 해남에 갔을 때, 그러나 나의 선입견은 깨졌다. 두 번째 남도 행에서 본 완도와 보길도, 세 번째 여행에서 오른 유달산…. 자연 조건상 타고난 풍요가 넘쳐흐르는 곳이 바로 ‘남도’였다. 이름난 리조트인 몰디브나 발리보다 더 따뜻하고 친절하고 먹을 것 많은 곳! 일단 여수로 떠나보자.
▲ 전라선 열차의 가락국수
여수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거나 비행기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기차가 더 좋다. ‘용산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세월아 네월아 내려가든지, ‘익산역’까지 고속 철도로 빨리 내려가서 다시 전라선으로 갈아타고 가든지 말이다.
점심때 여수에 내리려고 우리는 서둘러 길을 나섰다. 아침잠을 설쳐가며 기차에 오르니 피로가 밀려와서 익산까지는 졸면서 갔다. 새마을호 열차에는 식당차가 있어서 늦은 아침을 먹을 수 있었는데, 옛날에 먹던 ‘함박 스테이크’나 ‘오므라이스’는 메뉴에 없었다.
대신 속을 풀어주기에 맞춤인 메뉴들, 황태해장국이나 시원하게 끓인 가락국수가 인기였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밥’ 먹을 꿈에 부풀어 있던 나는 별 기대 없이 가락국수를 주문했는데, 국물이 제법 깔끔하니 좋았다. 고운 고춧가루를 청해 국물에 풀고 ‘중(中)짜 맥주’ 한 병을 남편과 나눠 마시니 기분이 흥겨워 지는 것이 여행의 워밍업으로 그만이었다. 국물까지 싹 다 마시고 한 시간여를 더 노닥거리다보니 어느덧 곡성, 순천을 지나 종착역인 여수에 기차가 멈췄다.
▲ 여수 한우갈비
배짱 좋게 아무런 예약도 않고 떠난 우리는 숙소를 찾는 데 시간을 좀 보내야 했는데, 다행이 바다가 보이는 모텔에 방이 하나 남아 있었다. 낡은 모텔의 작은 창으로 보이는 남쪽 바다는 형광등조차 제대로 켜지지 않는 남루한 방을 ‘커버’하고도 남는다. 배낭에 고이 모셔간 와인 한 병을 참지 못하고 열어버린 우리는 플라스틱 컵에 와인을 따라 파도소리에 잔을 마주치는 겉멋을 부려본다.
여수에는 도로로 연결 되어 있는 섬들이 몇 개 붙어 있는데, ‘오동추야 달이 밝아~’하는 노래로 유명한 오동도가 있고, 갓김치로 유명한 돌산도가 있다. 친정집이랑 시댁에 갓 김치를 좀 사갈까 해서 이집 저집을 둘러보다 보니 돌산도 속이 궁금해져서 내일은 섬으로 들어가자고 계획을 바꾼다.
저녁이 되어 출출한 속을 잡고 들른 곳은 여수 역 앞에 있는 ‘녹원 갈비(061-665-8729)’. 역사를 많이 뜯어 고치지 않아서 운치가 있는 여수역에 내리면 바로 보이는 청기와 집이다. 뼈대가 여린 암소 갈비를 심심하게 간을 해서 구워주니까 옛날 갈비 맛이 난다. 공기 밥을 청하면 토하젓과 김치가 나오는데, 직접 담근 찬이라고 사장님 자부심이 대단하시다. 자부심은 곧 맛으로 연결된다.
▲ 여수 돌산도 해수욕과 갯장어 카르파쵸
이맘때 여수에 가면 갯장어를 맛볼 수 있다. 흔히 일본말인 ‘하모’로 부른다. 여수 회 센터에 들러 회를 떠달라고 하면 펜션과 같은 숙소나 바닷가에서도 운치 있게 즐길 수 있다. 회를 떠서 돌산도의 방죽포 해수욕장으로 들어간 우리는 파라솔을 빌려 자리를 잡는다. 유명 해수욕장이 아니어서 붐비지 않아 더 좋은 바닷가에서 까맣게 몸이 탄 아이들과 어울려 수영을 하다 보니 금방 출출해진다.
얼음주머니로 차게 준비해 온 갯장어를 꺼내 뚝방 한쪽에 자리를 잡고 화이트 와인을 한 병 연다. 2만 원 어치 회를 떴는데 그 양이 많다. 초장을 찍어서 반쯤 먹다 보니 쫄깃한 회 맛에 새로운 레써피가 떠오른다. 나의 ‘식(食)창고’ 가방을 뒤져 올리브유, 식초, 다진 허브, 소금, 후추를 찾아낸다. 이태리식으로 먹는 ‘카르파쵸’를 만들기 위한 재료는 여기에다 다진 떪? 잣, 바질과 올리브가 필요하지만 뭐 아쉬운 대로 와인안주 할 만한 퓨전 요리가 된다. ‘카르파쵸’는 서양식에서 육류나 생선을 얇게 떠서 요리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잘게 회를 친 갯장어를 가지고 후딱 만들기에 알맞다.
▲ 통영 꼬지 김밥과 막썰이 회
아쉬운 여수를 뒤로 하고 경남 남해로 향한다. 하동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국도를 따라 가면 ‘한국의 금문교’라 불린다는 남해 대교가 눈앞에 턱 나타나는데, 그 풍광이 황홀하다. 개장한지 얼마 안 되는 설리 해수욕장의 아담한 물가나 운치 있는 미조항도 그렇지만,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라고 읊조린 이성복 시인의 ‘금산’이 내게는 오래 남는다. 지면상 말로 다 못하는 내 감상을 뒤로 하고 통영으로 넘어가 보자.
이름난 리조트도 있고, 최근 몇 년 사이 도시 발전을 이루어 살기 좋은 고장이 된 통영. 북적북적 사람이 많고, 먹을거리도 많아서 항구도시의 생동감을 느끼기에는 그만이다. 통영시의 옛 이름인 충무를 딴 ‘충무 김밥’이 명물이다. 뱃사람들이 먹기 편하도록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통영 시내에는 ‘옛날 충무 꼬지 김밥(055-641-8266)’ 집이 있는데, 매콤하게 양념한 오징어, 홍합, 꼴뚜기를 꼬치에 끼워 준다.
생각해보니 김밥 한 개 털어 넣고, 꼬지 한 줄 쭉 빼물면 그 것보다 간단하고 맛이 완벽한 식단이 또 없지 싶다. 서호시장 근처의 ‘연정 식당(055-644-1661)’에서는 해지는 저녁 막썰이회에 소주 한 잔 곁들이기 좋다. 갯장어를 섞어 적당히 잡은 각종 잔 생선을 말 그대로 막 썰어서 접시로 주는데, 가격 대비 훌륭한 맛과 양이다. 소주를 마신 다음 날 아침, ‘호동 식당(055-645-3138)’의 졸복국이나 길거리 음식인 ‘우무 냉 콩국’으로 속을 풀면 다음 여행지로 떠날 힘이 다시 솟아오른다.
‘피서지 맛과 맛집’ 취재를 핑계 삼아 남편과 둘이 대한민국을 돈지 한 달여.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여행’과 ‘결혼’의 닮은 점이라는 것이 우리 부부의 결론이다. 또, 일본보다 정겨운 온천, 유럽의 야시장 못지않은 시골 장터, 해외 리조트보다 풍요로운 남도가 있는데 홍보나 개발이 따라주지 못하는 현실도 안타깝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다짐한다. 서로를 더 알고 이 땅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여행을 본격적으로 떠나자고.
글 박재은ㆍ사진 임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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