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문학이론가 토도로프의 언명을 빌리면, 판타지는 ‘망설임(hesitation)의 문학’이다. 과학적 합리주의의 세계에 서서, 그 법칙과 상식의 질서 너머 초자연적 세계를 동경하는 순간의 망설임! ‘저쪽’ 세계를 응시한다는 것은, 그 행위 자체로써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 타자(他者)로 서는 일이다. 이 때의 망설임, 다시 말해 ‘너머’를 응시하는 행위는, 하나의 모험이 된다. 현대사회 비판과 전복의 위험한 모험. 그래서 판타지는 모험이다. 내용이 대개 모험담이어서가 아니라, 판타지를 읽는 행위 자체가 모험이라는 의미다.
판타지문학과 그 문학에 탯줄을 댄 다양한 문화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연대기, 해리포터, 드래곤라자, 어스시까지…. 인기의 비결은 물론 대중적 재미겠지만, 그 뿌리에는 현실의 바깥 세계가 주는 해방감에 대한 현대인의 갈구가 있을 것이다.(정크픽션은 재미에 그치지만, 좋은 판타지는 그 갈구를 해갈해준다.)
하지만 범람하는 서구 판타지의 물결 속에서, 동아시아 판타지의 서사 전통은 거의 외면됐거나 왜소한 아동 오락물의 범주로 떠밀려왔다. 이 와중에 동양 판타지의 큰 뿌리 가운데 하나인 ‘서유기’는 마땅히 주목 받아야 할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천축으로 불경을 얻으러 가는 당(唐)의 승려 삼장법사(현장)와 그의 문제적 보디가드들(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또 옥황상제와 신선, 보살, 천계에서 죄를 짓고 지상의 악귀로 변신한 수많은 불한(不漢)들과 스쳐가는 당대 민중들이 엮어가는 81가지(81難)의 모험담. 판타지로서의 서유기는 그 파란만장한 모험의 여정 속에 녹아있다. 지혜가 있고, 위트와 웃음이 있고, 배신과 분노와 슬픔이 있다. 그리고 당대 종교(불교, 도교)의 가치와 유가 사상의 바탕이 되는 수신(修身)의 이상이 담겨있다.
기왕의 여러 서유기 번역ㆍ개역 판본에 또 하나의 만화 판본이 보태졌다. 조태호(48ㆍ사진) 화백의 ‘진본 서유기’(맑은소리, 전12권)다. 4월에 출간된 고 고우영화백의 ‘서유기’(자음과모음, 전3권)가 고 화백 특유의 애드립의 묘미에 무게가 실렸다면, 이 책은 그 이름처럼 서유기의 작자로 알려진 오승은의 진본에 충실하다. 그는 “오승은본을 중심에 놓고, 연변인민출판사 번역본(현암사), 서울대 서유기번역연구회본(솔) 등을 대조해가며 꼬박 3년 동안 내용을 훑었다”고 말했다.
다만 진본에 충실하다는 것은, ‘말 풍선’의 재미가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의미일수 있겠으나, 조 화백은 ‘81난’의 내용 대부분을 온전히 살림으로써, 원본 서사의 자잘한 재미를 구현한다. 고화백본은, 재미는 있지만, 과도한 축약으로 허전함과 아쉬움을 남겼다.
먼저 1~3권이 출간됐다. 10월쯤이면 12권 전권 완간이 가능할 것이라고 출판사측은 전했다.
사진 김주성기자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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