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1남2녀를 둔 가장 박수영(가명ㆍ56)씨는 벌써 4년째 매일 아침 6시면 도시락을 직접 싸 고시원으로 향한다. 처자식이 주는 눈치,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냐”는 핍박 때문이다.
대기업에서 일하다 5년 전 두둑한 퇴직금을 받고 명예퇴직할 때만해도 그는 목소리 큰 한 집의 어른이었다.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주식으로 돈을 몽땅 날려 빈털터리가 되자 천덕꾸러기로 변했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이라도 따볼 요량으로 끙끙대지만 쉽지 않다. 그는 “신문에 나오는 가장들의 자살 얘기가 남 일 같지 않다”고 했다. “제가 죄인이죠.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는….”
파산을 면한 박씨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1일 대법원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상반기 개인파산 신청자가 5만명에 육박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배 늘었다. 개인파산 신청자 대부분은 가장 역할을 하는 우리의 아버지다.
실직이나 개인 부도로 경제력을 거세 당한 이 시대 아버지는 탈출구가 없다. 속사정을 털어 놓을 곳도 마땅치 않다. 가정 해체와 파탄 앞엔 속수무책이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실직 가장 100명 중 절반(58.3%)이 심각한 부부 갈등을 경험했고, 자녀(15~24세)와 고민거리를 서로 얘기한다는 아버지는 고작 4명에 그쳤다. 직장과 사회에 이어 가족으로부터 외면 받는 셈이다.
소외와 외면이란 ‘외딴 섬’에 갇힌 아버지는 가출과 노숙, 동반자살 등 극단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다. 지난달 30일엔 서울 광진구의 한 아파트에서 우울증에 시달리던 40대 실직 가장이 부인과 딸을 살해한 뒤 자살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
‘좋은부모되기운동본부’ 정 송 이사장은 “아버지들의 고민과 우울증은 전통적인 가장의 역할을 지키려는 안간힘 때문에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다”며 “적극적인 의사소통과 고민상담창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1995년부터 이 시대 아버지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던 ‘아버지의 전화’도 이미 지난해 말 자금난으로 ‘파산’했다. 올 가을 다시 개통하려 애쓰고 있다지만 월 700만원 이나 드는 운영비를 마련할 방안은 아직 없다. ‘아버지의 전화’ 관계자는 “매일 밤 10~50명의 아버지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 어깨에 지워진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줘 왔는데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탈출구 없는 아버지의 시대를 우려하고 있다. 남성사회문화연구소 이의수 소장은 “2020년엔 우울증과 심장질환이 남성의 죽음을 주도할 것이라는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서가 있다”며 “가부장적 사회가 무너져 남성이 주도권을 가진 가정을 찾아 보기 힘든 만큼 남성 특히, 아버지에 대한 사회의 인식 변화와 해법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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