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국이 태풍과 장마로 고생하고 있을때 우연히 고교동창을 동네에서 마주쳤다. 츄리닝과 슬리퍼 차림의 나를 본 그가 말했다. "요샌 비 많이 와서 촬영 안 하나 보지? 이럴 땐 비 오는 장면 찍으면 되지 않냐?" 10여년만에 조우한 친구에게 이렇다저렇다 하기 뭐해서 웃고 말았지만 이 지면을 통해 그 질문에 답하자면, 일단 비가 와서 촬영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촬영 중인 영화가 없어서다.
● 매사 준비가 90%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평균적으로 2년 남짓한 시간이 걸린다. 아이템 개발과 시나리오 작업에 걸리는 시간이 제일 길고, 캐스팅과 장소헌팅 등 '프리프로덕션'으로 불리우는 제반 준비작업들도 꽤 오래 걸린다.
빗속에서 만난 내 동창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영화 제작과정의 대부분으로 생각하는, 말 그대로 촬영 즉 '프로덕션' 기간은 정작 두세 달로 시간 기준으로는 전체 공정의 10~15%를 차지할 뿐이다. 요지인 즉, 영화감독이라고 늘상 카메라 옆에만 있는 건 아니고 오히려 카메라랑 떨어져 있는 시간이 훨씬 많으며, 설령 '찍고' 있진 않더라도 놀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
다음, 비 올 때 비 오는 장면을 찍느냐의 문제. 이건 나도 영화를 직업으로 삼기 전에는 잘 몰랐던 사실인데 답부터 얘기하자면 "NO"이다. 이유는 일단, 퍼붓는 장대비가 아니고서는 영화 카메라에 빗줄기의 상(像)이 제대로 찍히지 않는다.
또 영화촬영이라는 게 철저한 사전준비가 중요한데, 아무리 일기예보가 정확해졌다고 하지만 굵고 지속적인 비가 내릴 날에 맞춰 계획을 짜는 게 난망한 일이다. 결정적으로 고가의 영화촬영장비를 빗속에서 가동하는 위험 부담과 연기자, 스탭의 능률 문제가 있겠다. 그래서, 비가 오는 장면이더라도 맑은날 강우기를 틀어놓고 찍는 게 이 바닥의 정석이다.
그럼 지난 몇주처럼 연달아 비가 오는 날들엔 영화촬영을 쉬었겠다고? 영화제작자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엔, 특히 장마기간엔 실내촬영분을 미리 일정표에 짜놓는다. 7월 한 달 동안 양수리 종합촬영소를 비롯해서 전국의 영화세트장 일정 잡기가 힘들었다는 후문도 있다.
비는 그치고 이제 본격 더위가 시작된다. 휴가철도 정점을 향하는 중이다. 사실, 우리 직종은 따로 휴가가 없다. 어쩌다 바람 한 번 쐬고 올까 마음 먹어도 남들 다 가는 시기는 피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늘 철 지난 바닷가, 단풍 지나간 산자락 따위에 익숙하다.
● 휴가 잘 다녀오세요!
가끔 직장인 친구들은 자유로운 시간을 가진 나를 부러워하곤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들이 부럽다. 더구나 이런 휴가철엔. 교통체증, 북적거리는 인파, 바가지요금 짜증 난다고?
폐장한 해수욕장에서 삶은 옥수수가 먹고 싶은데 먹을 수 없는 설움을 아는가? 휴가란 자고로 남들 다 갈 때 가야 제맛이다. 아무리 차가 막혀도 명절 때 다녀온 고향과 한 주 지나 다녀온 고향은 천지 차이인 것처럼. 여러분, 휴가 잘 다녀오세요!
김현석ㆍ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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