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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가늘고 길게 살자"라니…

입력
2006.08.01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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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닐세. …풍부한 상상력, 뛰어난 감성, 소심한 생활을 뛰어넘는 탁월한 용기, 안락의 유혹을 극복하는 모험심…. 스무살의 청년보다 예순살의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세월만으로 늙지 않고, 이상을 상실할 때 비로소 늙어가나니. …그대가 기개를 잃고 비관의 눈(雪)과 냉소의 얼음에 덮여 있다면, 그대는 스무살일지라도 늙은이라네…>

● "스무살 청년도 늙은이라네"

미국의 사회ㆍ교육사업가 새뮈얼 울만(Samuel Ullman 1840~1924)이 남긴'청춘(YOUTH)'이라는 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에서 패퇴한 맥아더 장군의 사무실을 접수한 일본군이 벽에 걸려 있던 것을 발견했다.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클라크가 남긴'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말과 함께 전후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큰 재산이 됐다. 울만이 78세에 지었다니 젊은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늙은이'를 위한 것일 수 있겠다.

맥아더는 75세인 1955년 LA의 한 집회에서 이를 낭송해 미국에도 널리 퍼졌다. 한국에선 1997년 대통령선거 당시 71세였던 김대중 후보가 토론회에서 이를 암송하는 바람에 유명해졌다.

진부한 '청춘'의 구절이 생각난 것은 지난 주였다. 한국일보는"가늘고 길게 살자"는 제목의 기획특집에서 공무원 교사가 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젊은이들의 세태를 꼬집었다. 공무원ㆍ교사시험을 준비하는 속칭 공시족(公試族)들이 대입준비생 일색이었던 학원가를 휩쓸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승진도 필요없고 고액 연봉도 싫다. 그저 스트레스 덜 받고 가정에 충실하며, 가늘고 길게 직장생활 하는 게 최고다"라고. 세상물정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으면서 이를 탓할 수야 없지만,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은 어쩔 수 없었다.

기사에서 나이(30대 후반)와 고향(지방)이 같은 6급 공무원과 대기업 간부를 대비한 대목이 특히 그랬다. 그 공무원은 공직의 매력을"외환위기와 같은 충격파에도 끄떡 않는 고용안정"이라고 했다. 그 간부는"아이들 대학졸업 때까지 재직하며 학자금혜택을 받는 게 꿈"이라고 했다.

"국민을 위해 일하는 보람이 있다"거나 "전문능력을 계발하고 싶다"는 말들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철밥통이 깨질까 걱정하고, 구조조정에 전전긍긍하는 게 일상이었다.'가늘어도 좋다, 길게만 살아 다오'가 희망이요 꿈이다. 30대 후반인 그들은 젊은이인가 늙은이인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청춘'은 '고인(故人)의 옷'이 돼 버린 게 아닌가.

진부한 말이 또 있다."굵고 짧게 살자"는 사라진 금언. 월남전(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 10월 4일 파병이 예정된 맹호부대의 중대장 강재구 대위가 잘못 투척된 수류탄에 몸을 덮어 부하들 대신 산화했다. 나중에 그의 일기장에서 이 글이 발견됐다. 훌륭한 군인이었던 그는 자신이 짧게 살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수 있다.

일부러 짧게 살려는 것은 죄악이다. '어차피 짧은 인생, 좀 굵게 살아보자'는 금언이라면 지금도 유효하지 않을까.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Seneca BC4?~AD65)의 말도 인용하자."인생이 길다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흘려보내고 만다. 그들은 오래 산 것이 아니라 오래 존재했던 데 불과하다."

● "어차피 짧은 인생 굵게라도…"

우리의 청춘들이 갈망하는 공무원이나 교사는 '짧은 인생 굵게 살기'에 적합한 여건을 많이 갖춘 직업 가운데 하나다. 헌데 선망하고 지원하는 이유가'가늘고 길게 살기' 위해서라니, 혹 우리의 공무원이나 교사들에게서 그러한 면만 강조됐기 때문은 아닌지 안타깝다.

'청춘'들이여, 이번 휴가엔 새뮈얼 울만, 윌리엄 클라크, 세네카 등을 한번쯤 만나보자. 공무원이나 교사 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결코 가늘고 길게 살아선 안 되는 길임을 알려주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라도 훑어보자.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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