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와 장대비가 번갈아가며 하늘을 긋던 25~27일 한국일보와 함께 강원 수해지역 의료봉사를 다녀왔다. 수재민을 돕는다는 마음에 작은 영웅심도 느꼈다. 그러나 누더기가 된 밭에서 행여 양배추 하나라도 건질까 허망한 괭이질을 하는 노인들의 지친 표정을 보는 순간 우쭐함은 무력함으로 바뀌었다.
평창군 대화2리 마을회관에 임시진료소를 차렸다. 깊은 시름에 잠긴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진료소를 찾기도 힘든 이가 태반이었다. 주섬주섬 약을 챙겨 구급차를 타고 마을마다 찾아 나섰다.
“머리도 아프고 무릎도 쑤시고 숨도 차고…” 굽은 허리에 무릎을 짚은 채 이동진료소를 찾은 노인들은 한결같이 아픈 곳이 너무 많았다. 대부분 혈압이 높고, 기운이 없고, 당뇨가 있었다. 신난한 삶을 살아온 노인들의 증상은 비슷했다.
빚을 내 가꾼 7,000평 밭이 순식간에 휩쓸려간 아저씨, 물에 잠기면서 보일러가 터져 집안이 기름범벅이 돼 버린 할머니, 마을회관 한켠에서 손주와 구호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할아버지, 밭일을 하다 손조차 씻지 못하고 왔다며 겸연쩍어 하는 아주머니…진통제 주사와 약 처방보다 멀리서 찾아와 함께 가슴아파 해주는 우리의 존재가 이분들에게는 더 큰 치유가 되는 듯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도 비는 억수같이 내렸다.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야 서울 사람들이 좋아한다”며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살아남은 피망을 닦던 주민들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봉사를 한답시고 마음의 상처를 입은 분들을 행여 번거롭게 하지나 않았는지 걱정이다. 하루빨리 수해들 딛고 다시 일어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훈기 한양대병원 의료봉사단장 / 가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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