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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가상 인터뷰-대화] <22> 이시와라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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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가상 인터뷰-대화] <22> 이시와라 간지

입력
2006.07.31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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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1889 - 1949). 제국주의 일본군 장교. 그는 일본 육사와 육군대학 출신의 엘리트였다. 중좌였던 1928년에는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 1931년에는 작전과장을 지내면서 그의 선임자이자 직속 상관인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오(板垣征四郞)와 함께 만주전쟁(일본측 호칭으로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시와라는 젊은 시절부터 나폴레옹과 독일 프리드리히대왕 등의 전기를 탐독했고 1921년에 독일에 유학한 적이 있다.

그는 육군대학 창설이래 일찍이 없었던 두뇌를 가졌다고 말해지기도 했는데, 괴뢰국 만주국 건국에서는 소위 ‘오족협화’의 슬로건을 제시했다. 여기서 오족이란 일본족, 중국 한족, 조선족, 만주족, 몽고족을 가리킨다.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 괴뢰정부를 만든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환상 속에서 만주는 ‘동양의 아메리카’ 혹은 적어도 ‘동양의 서부’였다.

1937년 중일전쟁 개시의 시점에서 이시와라는 일본군 본국 참모본부(대본영)에서 작전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확대될 전선이 늪에 빠질 것이라고 예견하여 전쟁 불확대의 방침을 제창했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1935년에 관동군 헌병대장을 거쳐 1937년에 중장으로 관동군 참모장이었고, 1941년에는 일본군 참모총장이 되었는데, 도조와 대립하던 이시와라는 도조에 의해서 파면되고 예비역에 편입된다.

현 이시와라상, 아직 한국 사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넘어서고 있지 못한 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그러니까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적 내면세계로 들어갈 때마다, 당신은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었던 인물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관동군에 대해 설명을 좀 해주시죠.

이시와라 리상, 당신은 쇼와(昭和) 시대 초기(1920년대 후반)의 우리 대일본제국 지도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지도에는 우리 본토와 한반도, 대만, 남태평양 일부, 그리고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중심으로 한 요동 지역이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은 일로전쟁, 앗 그러니까 당신네 용어로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로부터 요동반도와 남만주철도의 부속지를 획득했습니다. 이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배치된 부대가 관동군의 전신이고, 1919년에 관동군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현 관동(關東)이란 이름은 산하이관(山海關) 동쪽이란 뜻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산하이관은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관문이지요. 전통적으로 중국 한족의 입장에서는 산하이관 바깥은 오랑캐들이 사는 곳이란 통념이 있었고요. 산하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청나라에 항복해서 명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고요. 결국 관동 지역은 중국의 동북지방, 즉 만주 전체를 가리키는 셈인데요.

이시와라 관동군은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4개 사단 및 독립수비대 5개 대대를 거느렸고 1941년에는 14개 사단으로 증강되었다가 한때는 74만 명 이상의 병력을 거느리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1943년부터는 남태평양에서 전력을 빼내가는 바람에 약해지기는 했지만요.

현 당시 한반도에는 어느 정도의 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나요?

이시와라 그건 때에 따라 다른데, 아마 조선 주둔 일본군은 많아야 대충 2개 사단 병력이었을 것입니다.

현 70만 명이 넘는 병력이라면 당시 계산으로 70개 이상의 사단이 만주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얘긴데 그 많은 병력이 왜 필요했지요?

이시와라 만주와 몽고 지역에 대한 대일본제국의 경략(經略) 필요성 때문입니다. 우선은 한반도에서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는 만몽 지역의 정치, 군사적 안정이 필요했고, 나중에는 대공황으로부터 일본 자본주의 체제가 빠져나오기 위해서 전형적인 식민지 시장, 즉 원자재 및 상품 시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적색 국가인 소련에 대한 우리 대일본제국 군부가 끊임없이 경계를 했었고, 또 다 알다시피 중국 침략을 위한 배후 지역 노릇을 한 게 바로 만주입니다. 만주는 한반도와 더불어 우리 대일본제국, 중국, 러시아 및 서구 열강들이 19세기부터 지역의 패권을 위해 경합한 곳입니다. 종전 직전에 소련이 참전하기 이전에 우리 관동군은 1938년의 장고봉 전투, 1939년의 노몬한 전투를 통해 국경 문제로 소련과 교전한 적도 있어요. 물론 노몬한 전투에서는 우리 관동군이 대패를 하기는 했지만요.

현 이시와라상은 운 좋게도 종전 직후 전범재판을 면했지요? 도조와 이타가키는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했는데요.

이시와라 도조는 ‘빠가야로’(바보 자식) 라 중일전쟁을 밀고 나갔던 거얏! 중국은 너무 넓어서 우리 일본군이 다 군사적으로 장악할 수 없었는데 말이얏! 내 구상대로 만주에서는 주로 소련군만을 견제하면서 곧 다가올 미국과의 최종 대전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결국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소련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우리 관동군 수뇌부가 포로가 되지 않았느냐 말이얏!

현 (‘입니다’ 말투에서 갑자기 반말 투로 바뀐 일본 ‘군바리’ 특유의 기세에 움찔) 포로라고 하시면은요, 한국에 잘 알려진 이로는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중좌가 있는데요. 세지마는 종전 직전인 대본영 참모로 태평양전쟁의 작전을 담당하다가 1945년 7월에 소련과의 협상을 위해 관동군으로 파견되었다가 시베리아에 11년간 억류되었던 사람이지요?

이시와라 응. 세지마 군은 나 못지않게 머리가 좋아서 육사를 2등,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배야. 귀환해서는 1958년에 이토추상사에 입사해서 종합상사의 비즈니스맨으로 크게 성공했지. 나카소네 수상의 브레인 역할을 하기도 했고. 한국에서도 세지마 군을 모델로 한 소설 ‘불모지대’가 1970년대에 번역되어서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고 들었네만. 아 참, 자네는 자꾸 태평양전쟁, 태평양전쟁 하는데, 그거 잘못된 말이야. 대동아전쟁이라고 해야지.

현 그게 뭐가 틀립니까?

이시와라 대동아전쟁은 대동아공영권을 만들고 지키기 위한 전쟁이란 뜻이고, 대일본제국 어전 각의에서 명명된 거야. 태평양전쟁이란 말은 맥아더사령부가 대동아전쟁이란 말을 금지시키면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라고 결정한 거고. 그러니까 대동아전쟁이 ‘당근’ 맞지.

현 으음… 아무튼요, 세지마 류조 자서전 등에 의하면, 박정희가 제일 숭배한 사람이 세지마 류조고 세지마한테 가르침을 받은 것은 박정희만이 아니고 전두환, 노태우도 마찬가지라고 하던데요. 전두환이 쿠데타를 할 때, 안가에서 일본대사한테 미리 통보를 했고, 노태우는 심지어 퇴임할 때 세지마에게 “대통령 관두면 뭘 할까요” 이렇게 묻기까지 했다는 소문이 한때 떠돌았는데요.

이시와라 그렇게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크게 보란 말이얏! 너희 조센징들은 지금 세계 무역대국 10위 안팎이라고 자랑하지만 동아시아에 대해 ‘X도’ 모르고 있어. 1930년대 만주 지배의 두 축은 우리 관동군과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였는데, 만철 조사부만 하더라도 만철 설립 다음해인 1907년에 만들어진 건데,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싱크 탱크였어.

이미 100년 전 얘기란 말야. 만주, 중국은 물론이고 남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지역 연구를 했다구. 너희 조센징들 일부가 동아시아 담론 꺼낸 지 10년 넘어가지만 연구해서 쌓아 놓은 게 뭐 있어? 만철 조사부는 제자 논문을 표절하거나 같은 논문으로 돈을 두 번씩 타먹지는 않앗! 만주국 정도는 우리 관동군의 대좌와 중좌들이 좌지우지했었다구.

현 (헉) 공부시켜주시는 김에 당시 만주 인맥에 대해 소개해주시죠.

이시와라 옛날에 만주 5인방 하면, 군대에서는 도조 히데키, 그리고 만철 이사와 일본 외무상을 지낸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만주국 국무원 총무장관을 지낸 호시노 나오키(星野直樹), 닛산자동차와 히다치제작소 설립자이고 1937년에 닛산을 만주국으로 옮겼던 아이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 그리고 만주국 산업부 차장으로 만주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들 수 있지. 이들 모두가 너희 오카모도(일명 다카키 마사오, 혹은 박정희)군의 스승인 셈이지.

기시군은 나중에 총리대신(수상)을 지내기도 했지. 기시의 친동생 사토 군도 수상을 지냈고. 다섯 명 모두 전범 용의자였고 이 중 네명은 A급 전범으로 재판에 처해졌는데 도조만 처형당하고 정치인과 기업인은 맥아더가 풀어줬지. 그런 맥아더를 너희 조센징들은 멋도 모르고 존경하고 좋아하더구만.

현 이시와라상은 본디 저의 적이지만 오늘은 선생님이니까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시지요.

이시와라 한반도가 해방된 것은 우리 대일본제국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덕분이야. 결국 우리 대일본제국 대신 동아시아 지역에 미국이 들어온 거구. 대동아공영권이 너희 현대사의 망령이라 싫다면 한미FTA도 비판하는 게 논리적으로 맞는 거야. 하지만 너희 조선은 힘이 약하니까 우리 대일본제국에 붙던가 아니면 미국에 붙던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게 현실적으로 맞겠지.

현 저는 친미파는 싫은데요….

이시와라 역시 자네는 듣던 대로 오카모도군이 만들어낸 ‘시대의 아들’이로구만, 하지만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가 불가피했다고 말한 안병직이나 한승조는 자네를 결코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다면, 도대체 자네는 어느 쪽에 붙을 건가?

현 고종의 아관파천이 바로 이와 비슷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던 겁니다. 그럼, 이만….

문화비평가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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