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강남의 한 유학원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는 김모(25)씨는 아이비리그(미국 동부지역의 8개 명문 사립대학을 총칭하는 말) 출신이다. 그는 고1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대학까지 마친 뒤 국내에 들어와 취업한 경우로, 현재 월 300만원 정도 받고 있다. 해외 명문대 졸업장이 국내 대기업 취업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에 실망, 돈이 모이는 대로 다시 석ㆍ박사 과정 유학을 떠날 예정이다. 그가 근무 중인 유학원을 만든 사람들도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등 명문대 출신 조기유학생들이다.
#2. 장모(33)씨는 고교 2학년 때인 1990년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났다. 보스턴 인근 명문 사립학교인 우스턴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보스턴대 경영학과를 남들보다 1년 앞서 마칠 때만 해도 화려한 미래가 보장되는 듯했다. 하지만 병역 문제로 미국 내 취업이 여의치 않자 군입대를 위해 96년 귀국했고, 제대 무렵엔 외환위기 여파로 기업들이 신규 채용을 줄이면서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는 1년여 허송세월 끝에 수입자동차회사 영업사원으로 취업할 수 있었지만, 그가 처음 유학을 떠날 때 그리던 모습과는 너무도 동 떨어진 것이었다. 그는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에서 자동차 인테리어용품을 들여와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90년대 중반 해외로 나갔던 ‘조기유학 1세대’는 주로 대학교수ㆍ연구원 등으로 취업한 전통적인 해외 유학파(국내 대학 졸업 후 석ㆍ박사 과정 유학)와는 진로가 크게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최근 조기유학 1세대의 국내 U턴이 본격화하면서 ‘유학생 인플레’ 현상까지 더해져 해외 명문대 졸업장이 더 이상 출세의 보증수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국내 고용상황이 악화하자 일부 유학생들은 어학원, 유학원 등 사교육시장에 뛰어들어 조기유학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미국 중부지역의 명문인 텍사스주립대 한국거주 동문 687명의 직업분포를 조사한 결과, 학계나 연구기관에 들어간 조기유학생은 극소수인 것으로 확인됐다. 조기유학 1세대가 대학에 본격 진학한 1989~98년 이 대학에 들어간 한국 유학생 37명 중 대학교수와 정부기관 종사자는 각각 1명에 불과했다. 가장 많이 진출한 분야는 대기업으로 21명(56.7%)이었으며, 다음은 국책기관과 외국계 기업 각 5명(13.5%), 중소ㆍ벤처기업 4명(10.8%) 등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국내 대학을 졸업한 뒤 텍사스주립대에서 석ㆍ박사 과정을 마친 전통적 유학파 122명의 경우 대학교수로 임용(74명)되거나, 국책연구기관(10명), 정부기관(6명) 등에서 일하는 사람이 총 90명(73.8%)에 달했다.
조기유학 1세대는 서울 강남 등의 사교육시장에도 대거 진출했다. 본보 취재팀이 서울 강남구에서 미국 수학능력시험(SAT) 준비반을 운영하는 21개 어학원을 대상으로 학원장의 경력을 파악한 결과, 절반이 넘는 12곳의 학원장이 조기유학생 출신이었다. 대학 재학 중 유학을 가거나 해외에서 석ㆍ박사 과정을 마친 경우를 포함하면 무려 17곳에 달했다.
미국에서 고교와 대학을 나온 뒤 강남에 유학원을 차린 박모(31)씨는 “조기유학생 상당수가 외국어학원 강사, 유학원 상담원 등 임시직을 전전하거나 취업이 안돼 아예 재유학을 떠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학부형들이 확실한 목표의식 없이 조기유학을 보냈다간 자녀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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