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마다 빠지지 않는 쇼핑 목록 중 하나가 바로 티셔츠(T-shirts)다. 이번 여름에는 상체가 날씬해 보이는, 커다란 활자체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와 티셔츠 여러 장을 이어 붙여 원피스로 변신한 리폼 티셔츠를 장만 했다. 물론 월드컵응원을 위한 빨간색 티셔츠도.
티셔츠는 특별히 유행을 타지 않는 옷임에도 불구하고 꼭 다시 구입하게 되는 패션 아이템이다. 스포티하고 캐주얼한 옷이지만 여성스럽게, 혹은 섹시하게 변신하기도 하는 기특한 아이템이니까. 그것도 매우 저렴한 값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 평범한 티셔츠가 사실 ‘사상’을 품고 있는 옷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얼마 전 여성복 구호(KUHO)의 가을ㆍ겨울 패션쇼를 보고 나온 행사장 홀에 새하얀 티셔츠 몇 장이 전시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상한 여성복쇼에 어인 일로 티셔츠가 내 걸려 있지? 이 티셔츠들은 여성복 구호에서 시각장애 어린이들의 개안수술 기금마련을 위한 캠페인에 유명인사들이 디자인한 ‘도네이션(Donation)’ 캠페인 티셔츠들이었다.
구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구호는 하트 모양에 실버 스냅 단추를 가득 채워 시각 장애 어린이들이 손으로 사랑을 만져볼 수 있게 했으며, 영화배우 장미희는 소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어린 왕자의 소중한 꽃이었던 장미를 조각 천 형태로 디자인했다.
또 ‘그림 읽어주는 여자’의 아티스트 한젬마는 하늘을 보여 주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가슴 부분에 지퍼를 달았고, 사진작가 김현성은 하늘을 담은 사진 위에 점자로 영문 ‘HEART’를 새겨 넣어 촉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각각의 의미를 담은 티셔츠의 모든 수익금은 시각장애 어린이들의 수술에 사용한다니, 평범한 티셔츠 한 장이 아름답고 숭고한 뜻을 품고 내걸린 것이었다. 이 같은 ‘기부’ 캠페인 뿐 아니라 티셔츠는 수많은 ‘피켓(picket)’의 의미를 담아낸다. 1970년대는 ‘Make Love’, ‘Not War’같은 문구를 적어 자연회귀와 전쟁반대를 외쳤고, 1980년대에는 ‘핵무기 반대’, 1990년대의 ‘Save The Earth’, ‘Stop AIDS’ 등 사회가 직면한 커다란 이슈와 정치적인 입장을 외쳤다.
티셔츠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 대중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그 시기에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아 티셔츠가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프린트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남성들의 속옷이었던 티셔츠가 소녀들 사이에서 청바지와 함께 크게 유행했는데 화려한 프린트와 재미있는 문구가 들어 있는 티셔츠가 청소년들의 취향에 딱 맞아 떨어졌다.
이때부터 기업이나 광고회사, 스포츠클럽, 대학들은 온갖 홍보문구와 슬로건과 상징이 적힌 티셔츠를 제작했다. 정치권도 티셔츠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정당의 선거운동의 정치적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나눠주고 단체로 착용해 자신들의 뜻을 단순하고 쉽게 전달했다.
티셔츠의 집단의식은 청년문화를 대변하기도 했다. 그들의 우상인 스타의 이름이나 얼굴을 프린트한 ‘팬 티셔츠’로 애정을 표현했다. 티셔츠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단체나 모임에 필수적인 소속감과 ‘기념품’의 자리에도 오른다. 로고명과 브랜드를 뜻하는 작은 표시들은 새로운 기호가 됐다. 자신이 속하고 싶고 소망하는 집단을 표시하는 로고명을 인쇄한 티셔츠들은 인기 상품으로 소비시장을 확대해 나갔다.
사회 다수가 그들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도구로 티셔츠를 선택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티셔츠는 처음으로 대중화의 길을 연 옷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의 발단은 면방직 공장의 발전에 의해서였는데 가내 수공업으로 생산되던 면직물이 대량생산되면서 면직물 의류의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졌고 덕분에 하층민들도 값싼 돈으로 의류를 사 입을 수 있게 됐다. 대중적인 인기의 힘으로 티셔츠는 속옷에서 작업복으로, 또 운동복으로, 젊음과 자유를 상징하는 청년들의 애장품으로 변화무쌍한 유행의 홍수 속에서도 굳건히 변치 않고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백지의 얼굴이었던 티셔츠에 프린트가 나타난 것을 원시인들이 종족을 표시하는 문신과 문양에 빗대어 문명의 시작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문자를 문양화하기 때문에 어떤 패션 아이템보다 티셔츠의 ‘기호’는 매우 직접적인 표현력을 지닌다. 또한 티셔츠는 ‘복제’가 쉽다.
따라서 전단지처럼 홍보와 광고의 수단이 되기도 하는 티셔츠. 하지만 티셔츠는 대중적이고 실용적인 의류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문구가 적힌 ‘광고’의 수단이더라도 강제성이나 거부감이 없다. 자유로운 개성으로 받아들여진다.
티셔츠는 어느 패션 아이템보다 값싸게 멋을 부릴 수 있다. 또 다양하게 상품화된 티셔츠는 골라 입는 재미를 준다. 모든 사상과 유행을 수용하고 복제하는 티셔츠. 당신의 티셔츠는 어떠한 사상을 담고 있는가?
박세은 패션칼럼니스트 suzanpar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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