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가 경제성장률 6%를 내놓길래 저도 약 올라서 7%로 올려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7%는커녕 지난해 3.1%, 올해 5%에 그쳤으니 매를 맞아도 싸죠."
2004년 11월 남미 순방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에 도착, 동포간담회를 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대선공약으로 제시한 임기 내 7% 성장률 달성의 숨은 배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노 대통령 특유의 솔직한 화법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됐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이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허탈함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졸속협상 비판 아프게 새겨라
국가경제 운영의 기본목표나 다름없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엿장수가 엿 자르듯 상대 후보 성장률에 1%를 얹어서 만든 것이라는 고백은 아무리 정치인의 말이라 해도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후에 성장률 목표치를 6%로 낮추었지만 임기 후반에 이른 지금까지 한 해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즉흥적이라는 수식어는 노 대통령의 행태를 비난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어휘가 돼 버렸다. 사례를 들자 해도 너무나 많다. 지난해 7월 노 대통령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돌출된 대연정 구상은 여름 내내 정치권에 평지풍파만 야기한 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노 대통령은 "4·30 재·보선으로 여당의 과반수가 무너졌을 때부터 준비했던 논리"라며 "발표 시점을 놓고 고심하다가 종합주가지수가 1,000포인트를 넘어 안정되는 것을 보고 정치개혁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배경설명을 했다.
주가지수가 대연정 구상 발표시기에 영향을 주었다는 대목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잘 납득되지 않았었다. 올해 초에는 양극화 해소를 위한 증세 문제를 꺼냈다가 반대여론이 비등하자 "국민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없던 일로 돌렸다. 대통령의 문제 제기가 "안 되면 말고 식이냐"는 또 다른 비난이 이어졌다.
지나간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온 나라를 들끓게 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성사 여부가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신뢰에 좌우되는 결정적 국면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가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비난은 반대 논리의 가장 앞 부분에 나오는 글이다.
이 구상이 1월 18일 대통령 신년연설에서 처음으로 제기됐고, 이어 2월 3일 공청회 무산과 함께 협상개시가 선언됐다는 점에서 졸속이라는 지적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한ㆍ칠레 FTA 체결에도 3년 이상이 걸렸는데, 그 보다 몇 십배 몇 백배 중요한 한미 FTA를 어떻게 1년 내 체결하려 하느냐는 비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제는 노 대통령은 직접 나서 국민의 의구심을 해소하고 설득을 시켜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청와대 회의 석상에서 "소신과 양심에 따라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간단히 언급했을 뿐이다. 반대세력이 제기한 '4대 선결과제'에 대해서는 양보는 부인했지만 '반대세력의 인식'은 인정한다고 밝혀 반대세력의 기세를 돋우게 했다.
● 대통령 직접 국민설득 해야
한미 FTA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대통령의 태도가 불신의 불씨를 키워가고 있다. 점점 거세지는 반대 움직임에 불안감을 느끼며 결국에는 또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손을 떼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극단적인 보수세력에서는 이 모두가 반미세력을 결집하려는 사전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음모론까지 거론하는 상황이다.
정부가 최근 물러난 경제부총리를 다시 끌어들여 한미 FTA체결지원위원회를 구성하고, 전 부처가 나서 홍보공세를 펴기 시작한 것은 여론이 그만큼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민심의 흐름을 바꾸려면 이런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서 확실한 믿음을 심어 주어야 한다.
이 협상이 갖는 국가적 의미에서나, 대통령 자신이 제일 먼저 한미FTA의 깃발을 올렸다는 사실에서도 더욱 그렇다. 승부사라는 별명에 맞게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설득에 나서 승부를 걸어야 할 시점이다. 국민들이 불확실한 미래에 발에 내딛게 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확신에 찬 리더십이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이다.
배정근 논설위원 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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