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앞에 가장 솔직해지는 생의 한 사건이 죽음이 아닐까. 그래서 유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일까. 원로ㆍ중진 작가 101명의 가상 유언장을 묶은 책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경덕출판사)이 나왔다.
연전에 작고한 이형기 시인도, 이 가상 유언장을 쓰면서, 죽음과 유언에 대한 그 같은 생각을 했던지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제대로 하자면 모든 글은 유언적인 성격을 갖는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세상에 마지막 남기는 글을 쓴다는 마음가짐으로 써야 하는 것이다.” 그 마음가짐으로 “원고지를 앞에 하고” 앉는 일의 어려움을 광대한 사막 앞에 선 개미 한 마리의 심정이라고 적었다.
책에 실린 문인들의 가상 유언장은 다분히 문학적이고, 또 대체로 반성적이다. 요컨대 자신들의 생애라 해도 좋았을 문학에 대한 자성이다. 소설가 유현종 씨는 신문 연재소설 성공 뒤의 일을 이야기 하며 “너 잘한다며 신문들이 다투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으려 했을 때, 과감하게 거부하고 거절하며 자유로운 입장을 선택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 그러면서 그는 “아비가 쓴 작품들을 모두 다 찾아내어 수거”하라고, “남 앞에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다만) 한 벌만 디스켓에 담아 내 무덤에 합장해주면 고맙겠다”고 유언한다. 소설가 하성란 씨도 어린 딸에게 남기는 유언장에 “네가 얼마 전에 물었지. 엄마는 삼류 작가냐, 일류 작가냐?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였겠지. 그런데도 엄마는 가슴이 철렁했다. 너의 그 질문이 내게는 너의 인생이 삼류냐 아니냐로 들렸거든….” 이라는 구절을 넣어두고 있다. ‘나의 소설들에게’ 쓴 소설가 전상국 씨의 유언장 결구의 문장도 서늘하다. “항상 나보다 앞서 있는 내 독자들을 내가 얼마나 두려워했는가를 너희들이 증언해 주기를 부탁한다. 내가 그처럼 사랑했던 모국어의 몇 구절만이라도, 그 언어에 은유로 담았던 한 시대의 작가의 고뇌와 외로움에 대해서도 나의 소설들, 너희들의 담담한 증언을 기대한다.”
“큰애야, 엄마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명심하거라. …맨 먼저 나 죽거든,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내 시신을 수습하여 114에라도 물어 제일 가까운 화장장으로 가서…”로 시작하는 소설가 공선옥 씨의 물기 어린 매뉴얼 같은 유언,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강의록 정돈하듯 쓴 고(故) 구상 시인의 유언…, 원로 수필가 피천득 씨의 가상 유언장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수필이다.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해보기도 한다. …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염치없는 사람이다.”
각자의 개성과 독특한 사유, 죽음을 대하는 감성으로 압축된 문인들의 이 많은 가상 유언장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한 문장을 꼽으라면, 소설가 한말숙 씨가 물기 없는 문장으로 번호까지 붙여가며 써 내려간 글 귀퉁이의 이 글이다. “너희 아빠의 재혼은 안 된다. 아빠는 손이 안 가는 분이시니까 너희들 중 여건이 맞는 사람이 아빠 가까이에서 살면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차마 놓을 수 없고, 놓고 싶지 않은, 이 사랑…!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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