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론자들이) '선결조건'으로 해석한다면 대통령 결정으로 수용하겠다."
노무현 대통령이 며칠 전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이같이 '선언'함으로써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한 이른바 '4대 선결조건' 논란이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스크린쿼터 축소,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건강보험 약값 현행유지, 자동차 배출가스 기준강화 유예 등 4가지 한ㆍ미 통상현안을 정부가 FTA 협상을 앞두고 미리 양보했느냐, 혹은 미국측에 양보할 뜻을 내비쳤느냐가 논란의 내용이다. 통상현안이라지만, 4가지 모두 미국이 한국에 일방적인 양보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정부는 그 동안 반대론자들의 비판에 대해 그 같은 양보를 한 적도 없고, 그것이 FTA의 선결조건도 아니었다고 반론을 펴왔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 있기 하루 전만해도 김종훈 한ㆍ미 FTA 협상 수석대표는 언론재단 포럼에서 "스크린쿼터 축소는 FTA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나머지는 FTA와 상관 없는 오래된 통상현안이었고, 미국측에 양보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4대 선결조건이란 말 자체를 부인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반대론자들의 태도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대통령이 수용했으니 당연히 환영하고 기뻐해야 할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바로 노 대통령 특유의 '알쏭달쏭 어법'에 있다.
노 대통령은 4대 선결조건이라는 해석을 수용한다면서도 "부당한 양보를 하여 국익을 손상한 바 없다"고 강조했다. 이는 마치 "너희들이 그렇게 우기니, 그래, 그렇다고 하자.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논란을 끝맺기보다 상대방의 화를 돋구는 말장난 같이 들린다.
여기서 '4대 선결조건'이란 표현이 정부문건에도 있었다느니, 통상교섭의 최고책임자가 미국측에 선결조건의 해결을 구두 약속했다느니 하는 논란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까지 정부가 일관되게 FTA의 선결조건이 아니었다고 부인해온 것들을 대통령이 뒤늦게 인정한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그 동안 다른 주장을 해온 데 대해 사과는커녕, 논란의 초점을 단지 표현의 문제로 돌린 사실이 오히려 심각하다.
대통령의 알 듯 말듯한 발언은 논란을 해소하기보다 국민의 불신을 키우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이 '해석을 수용'했으니 협상 대표들은 이제 더 이상 "그게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됐다. 이는 단지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에 대한 신뢰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
한ㆍ미 FTA 반대론의 이면에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짙게 깔려있다. 외환위기와 카드사태, 최근 론스타 사건을 거치면서 국민들은 공무원들의 무소신과 무책임을 목격한 바 있다. 정권이 바뀌면 소신도 바뀌고, '정책적 판단'이라는 면죄부를 내세워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 관료들을 신뢰하긴 어렵다.
정부가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나 미군기지 반환 등 대미 협상에서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여온 것도 한ㆍ미 FTA 협상에 신뢰를 보내지 못하는 이유다. 사정이 이런데도 국민의 우려와 반대를 마치 이해부족이나 홍보부족 때문인 양 호도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것이다.
김상철 경제부 차장대우 s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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