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 ‘가재미’(문학과지성사, 6,000원)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편평한 몸으로 나서 제 몸을 모로 세우려는 욕망 없이 ‘좌우로(만) 흔들며’살다 가는 수평의 목숨. 가재미는 시인의 고향인 경북 김천 지방에서 가자미를 부르는 방언이다.
표제에서 연상된 것일까. 시집에는 수평의 이미지, 평면 지향의 서정이 도드라져보인다. 물에 누워 그 커다란 바퀴로 물 위를 구르는 수련의 “평면의 힘!”(‘수련’) “대팻날을 들이지 않는, 여물고 오달진 그런 몸의 마루는 없어요”(‘마루’), 벽을 타고 오르는 넝쿨의 새순도 “평면적으로 솟”고 그 너른 풍경 앞에서는 “한 世界가 평면적으로 솟는다”(‘넝쿨의 비유’)
‘저수지’라는 시가 있다. “…//일어서본 기억이 없다// 산도 와서/ 눕는다/ 病이 病을 받듯/ 물빛이 산빛을 받아서// 넘어가본 기억이 없다/ 산빛이 차도 넘치지 않듯이// 먼길을 돌고 돌아가 만나는,/ 마음이 누운 자리” 모든 것들을 받아 안으면서도 텅 빈 듯 누운 물의 얼굴, 수평의 얼굴, 떠돌던 마음이 마지막에 되돌아가 눕는 그 자리는 ‘빈집의 약속’이라는 시가 전하는 빈집 같은 마음의 풍경과 다시 포개진다.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 마음이 가장 행복한 때는 ‘미륵의 미소’라 할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가 들어앉을 때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하지만 그 위안의 고요마저 시인은 욕심내지 않는다.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이 무욕의 희망은, 제 때 거두지 못한 텃밭의 열무가 흰 꽃을 피우게 하고 그 꽃마저 나비들에게 내주고 마는 ‘극빈’의 서정으로, 넝쿨처럼 평면적으로, ‘식물적으로’ 고요히 나아간다.
‘가재미’와 달리 간단없이 치켜서는 대가리의 욕망, 하늘이 기른 잠자리 날개의 그 “무서운 수평”과 달리 내가 세운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수평’)을 그의 시들은 조용히 잠재운다. 미륵의 미소가 말의 폭력을 잠재우듯.
두 번째 시집 ‘맨발’에서 시인은 시간 속에 갇힌 존재의 비의를 어스름 해질녘의 풍경속에서 추상이 아닌 구체의 일상으로 노래한 바 있다. 시단의 이름난 상들을 휩쓸다시피 한 이 젊은 시인의 시의 힘은, 깊이 오래 묵혀 정제된 서정으로 이 무거운 사유의 무게를 너끈히 떠받치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평면의 힘!”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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