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문화가 발달했다고 이름난 나라들을 다녀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산지(産地)’에 연연한다는 것. 미국의 아이다호 지방에서 만든 감자를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만든 버터에 볶아서 살짝 구운 일본의 고베 산 스테이크에 곁들인다. 굵게 결정 맺힌 오키나와 소금이나 프랑스 디종 지방에서 만든 겨자에 톡 찍어 먹는 고기 맛에 뻑뻑하게 볶아진 미국 감자가 잘 어울린다.
런던, 파리, 뉴욕, 도쿄는 패션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원산지’를 따져서 진열된 전 세계의 식재료를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가(高價)의 드레스를 걸치고 잔뜩 멋을 낸 레이디가 조미료 잔뜩 든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우다 보면 그녀의 피부는 우툴두툴해져서 드레스에 어울리지 않게 되어버린다.
명품 드레스를 입지 않은 촌부가 내 고장에서 뿌리고 거둔 식재료로 세 끼 밥을 충실히 먹고 살아 피부가 탱글하니 윤이 나게 되면 그 자체로 빛이 나게 된다. 입고 걸치는 멋 이전의 멋, 내면을 업그레이드 해주는 비결은 바로 식재료. 식재료가 명품이면 피부도 건강도 정신도 명품이 된다.
명품 식재료는 몇 십만 원을 호가하는 캐비아(철갑상어의 알) 뿐이 아니다. 만든 사람의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품질을 자랑하는 것이 명품이라면, 나주 배, 벌교 꼬막, 봉화 송이, 밀양 깻잎이 명품이다. 만든 사람의 자부심이 담뿍 들어있고, 화학 첨가물과 같은 속임수를 쓰지 않은 순도 100퍼센트의 상품, 그것이 바로 명품 식재료다.
● 섬진강 재첩+예산 국수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골목에는 조촐한 밥집들이 몇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하동 댁 아주머니가 끓여주는 재첩국 때문에 ‘가보자 식당’에 자주 간다. 특히 소주를 많이 마신 다음 날이나 으슬으슬 몸살기가 있어서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을 때 내 발은 저절로 하동 아주머니에게 향하는데. 그렇게 내 입맛에 친숙해진 재첩은 섬진강에서 건져 올린 놈들이 ‘오리지날’이라고 아주머니께 듣고 들은지라 재첩이 제철인 봄에 얻어다가 얼려두고 쓴다.
엄마 친구 분께 선물 받은 예산 국수. 굵직한 면발의 건면이 어느 선비의 붓 다발처럼 꼼꼼히 묶여있고, 포장지에 만든 이의 사진과 이름이 있다. 주재료인 밀가루와 옥수수 전분은 아쉽게도 수입산을 써야 했지만 엄선하였고, 햇빛에서 건조시켰기 때문에 쫄깃하고 부드러운 맛이 간직되어 있다고 쓰여 있다. 다시마랑 가다랭이포로 국물을 내어 국수를 말았더니 시원하고 맛있다. 국수가 단맛이 있는데다가 뜨거운 국물 속에 있는 동안 풀어지지 않아서 먹는 내내 맛이 일정하다.
먹다보니 이정도의 찰기라면 파스타 대용으로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이 나면 바로 풀어버려야 하는 성격상, 바로 실행에 들어가 보았다. 면의 굵기를 보니 고기 소스에는 좀 약하겠고, 조개 정도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봉골레 파스타(조개로 맛을 낸 파스타)’를 응용하기로. 냉동을 뒤져보니 조개라고는 잘잘하게 살을 골라 얼린 재첩뿐이다.
해동 시켜서 재첩과 국물을 분리한 다음, 올리브유를 팬에 달구어 마늘을 볶다가 재첩을 넣는다. 달달 볶다 보면 마늘이랑 올리브기름의 향이 재첩에 배어 벌써 냄새가 맛있다.
여기에 요리용 화이트 와인을 부어 주어야 제 맛. 잡내를 없애주며 은은한 맛을 한 겹 덧씌우는 과정이다. 와인이 질척하지 않을 정도로 증발하고 나면 아까 걸러 둔 재첩 국물을 붓는다.
국을 끓이는 것이 아니므로 자작하게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생크림을 아주 조금만 넣는다. 여기에 삶아 둔 국수를 넣어 약 불에 졸이 듯이 볶아주다가 통후추, 파 또는 파슬리, 레몬 즙 등을 기호에 맞게 첨가하여 마무리하면 된다. 이런 레써피들이 대중화 된다면 세계 각국의 파스타 집들마다 코리아 예산 국수를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 정선 감자 통구이
얼마 전 정선에 다녀오면서 감자를 한 보따리 싣고 왔었는데, 벌써 감자 소쿠리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빨리 먹어 치우고 있다. 연일 내린 비에 헛헛해진 속은 곱게 갈아서 부쳐 낸 감자전과 애호박이랑 함께 썰어 넣고 끓인 국수장국에 양파랑 버섯을 잔뜩 넣어 끓인 감자 국, 쌀 위에 툭툭 썰어 넣고 지어 낸 감자밥으로 채웠다.
그 입맛이 질릴 때면 은박 호일에 감자를 통으로 싸서 오븐에 구운 다음 버터나 크림치즈, 소금과 통후추를 뿌려가며 먹기도 했다. 물이 많아서 퍼석한 일반 감자와는 달리 밤고구마처럼 속이 찹찹한 정선 감자. 국물에 넣어 끓여도 다 먹을 때까지 모양이 유지 되고, 구워 먹으면 수분 함량보다 전분이 월등히 많아서 산(山) 냄새가 확 풍긴다.
서울의 명품 백화점들마다 와인 숍과 유기농 수입 식품 코너는 이제 필수 사항으로 갖춰져 있다. 일반 감자와 정선 감자의 냄새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고가의 유기농 커피를 마신다고 미식가 흉내를 내는 이들도 늘어가고 있다.
이에 반해 대를 이어 명품 농산물을 만들어 온 농민들은 나라가 알아주지도, 보호해 주지도 않는다. 맛있는 한우, 믿을 수 있는 국산 쌀은 하늘에서 공짜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피와 땀인 것을. 그 피와 땀이 헛되지 않게 해주는 것이 이 나라와 국민들이 ‘거리 응원’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EBS요리쿡 사이쿡 진행자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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