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裕仁ㆍ1901~1989) 일본 천황은 생전 A급 전범을 야스쿠니(靖國)신사에 합사(合祀)한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으며, 이 때문에 야스쿠니 참배를 스스로 중단한 것으로 밝혀졌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20일 히로히토 천황의 생전 발언을 생생하게 담은 메모집을 단독 입수해 보도했다. 1988년 도미다 아사히코(富田朝彦) 당시 궁내청 장관(2003년 작고)이 직접 기록한 메모집에서 히로히토 천황은 야스쿠니 신사의 A급 전범 합사에 강한 불쾌감을 표시한 후 “그래서 나는 이후 참배하지 않았고, 그것이 내 마음”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메모집에 대해 “자료의 신뢰성이 매우 높다”며 “그 동안 히로히토 천황의 야스쿠니 참배 중단과 둘러싼 여러 가지 억측들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평가했다.
A급 전범의 야스쿠니 합사에 대한 천황가의 속내가 담긴 자료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일본 사회에 미묘한 파장이 번지고 있다. 더욱이 패전 후 8차례에 걸쳐 야스쿠니를 참배했던 히로히토 천황이 참배를 돌연 중단한 이유가 A급 전범 합사라는 것이 드러나자 사회 전체가 술렁거리는 분위기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8ㆍ15 참배 강행이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돌출한 이번 메모집은 9월 자민당 총재선거를 앞둔 일본 정국에 직격탄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천황의 속 마음이 알려진 상황에서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민 여론이 어떻게 변화할 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三晋) 관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아직 자료를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며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서는 “총리 자신이 판단할 문제”라고 버텼고, 자신의 참배 여부에 대해서는 “국가를 위해 싸운 분들에게 존숭(尊崇)의 마음과 명복을 비는 기분을 계속해서 갖고 싶다”고 얼버무렸다.
자민당 내 분사론자들은 희색을 보이고 있다. 고가 마코토(古賀誠) 유족회장과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무성 장관 등의 정치가들은 그 동안 “천황도 참배할 수 있는 야스쿠니를 만들자”며 분사론을 주장해왔다.
도쿄=김철훈 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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