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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도서관] 전란 후의 '새별 학급 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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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도서관] 전란 후의 '새별 학급 문고'

입력
2006.07.17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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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날 선생님께서는 교실에 네 단 높이의 책꽂이를 들여놓으시고는 우리들에게 집에 있는 책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휴전 된 지 고작 3년,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하루하루의 생존이 어려웠던 시절에 어린이용의 변변한 책이 있을 리 없었다. 아이들은 ‘아리랑’ ‘명랑 ’ 등의 통속 대중지나 야담책 일본어로 된 헌 책들도 가져 왔다. 선생님은 그 중 동화책들을 고르고 당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합쳐 책꽂이를 채우고는 ‘새별 학급 문고’ 라는 이름을 붙이셨다.

도서부가 만들어져 아이들은 도서부원에게 이름과 함께 대출 날짜와 반납 일자를 적고 빌려 가곤 했었다. 나는 학급 문고에서 강소천과 마해송과 방정환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었고 위인전과 어린이용으로 번안ㆍ번역한 ‘철가면’, ‘돈키호테’ 등을 읽었다. 워낙 헌 책이었던 데다가 조악한 재질의 책들은 곧잘 찢어지고 낱장이 떨어져 나갔다. 방과 후에는 도서부원들이 도서 정리를 하고 겉장에 마분지를 덧대거나 떨어진 낱장을 풀칠하여 붙이는 수선작업을 하였다.

유독 글짓기 수업에 힘을 쏟고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이야기 들려주는 것을 즐기던 선생님은 소박하고 기초적인 도서관 기능을 적용하셨던 것이고, 그것은 비록 네 단짜리의 작은 책꽂이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내가 경험한 최초의 도서관이었다. 한 끼니의 밥이 어렵고, 어린아이들이 거리로 내몰려 구걸하거나 돈벌이에 나서야 했던 간난의 세상에서 그 작은 ‘새별 학급 문고’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눈물겹다.

어느 날 우리는 모두 교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머리위로 올리는 벌을 받았다. 선생님이 학급 문고 점검을 하시던 중 책장이 서너 장 한꺼번에 부욱 찢겨나간 것을 발견하신 것이다. 한 아이가 변소 가는 일이 급해 책장을 뜯어 뒤지로 썼다는 자백을 하고 나서야 우리는 벌에서 풀려났다. 밥이 육신의 양식인 것처럼 책은 마음과 정신을 키우는 양식이다. 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결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선생님의 표정은 마치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아멜 선생님처럼 비장하고 슬퍼보였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쓸데없는 책 따위나 읽는다는 부모들의 꾸지람이 당연한 다반사였던 그 시절, 몸과 마음이 다같이 가난하고 위태로웠던 어린아이들을 위해 작은 학급 문고를 마련하고 책 읽기의 소중함과 가치를 일깨워주려고 애쓰시던 선생님. 먹거리만큼, 아니 그보다 더 귀하고 절실한 것이 읽을거리라는 것을 아신 선생님의 마음이 우리를 키웠다는 것을 아주 훗날에 가서야 나는 깨달았다.

소설가 오 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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