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8월 군 장병 대상의 대공설문 조사에서 이상석씨의 친구인 A씨는 “이씨가 알고 지내는 김진호가 수상하다”고 적었다.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심사과는 이씨와 교사였던 김씨를 연행했다. 이씨는 조사를 받으면서 전역일인 10월22일을 넘기게 됐다.
실형이 선고되기 전에는 전역일에 맞춰 복무를 자동으로 끝내야 하지만 보안사는 전역일 하루 뒤인 10월23일 해군본부에 압력을 가해 전역명령을 취소토록 했고, 11월3일 이씨를 구속했다.
이씨는 민간법원이 아닌 군법회의에 회부돼 재판을 받았고 1년간 형을 살았다. 그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북한이 못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거짓 자백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인정됐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13일 강제징집ㆍ녹화사업과 실미도사건의 최종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이씨 등의 확인된 피해자들의 사례를 공개했다.
●강제징집ㆍ녹화사업
국방부와 보안사는 88년 국회 5공비리특위에 80년부터 시작된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피해자를 각각 447명과 429명으로 보고했지만 과거사위는 강제징집 피해자가 1,152명, 녹화사업은 1,192명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전두환 정권은 제적ㆍ정학ㆍ휴학 처리된 운동권 학생을 특수학적변동자로 분류해 강제입대 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신체검사 등의 기본 절차를 무시, 소아마비 장애인까지 강제징집됐다.
당시 보안사는 강제징집자를 순화하고 학원첩보를 수집할 목적으로 녹화사업에 착수했지만 정상적으로 입대한 병사나 민간인도 전담 공작부서인 심사과로 끌고 가 의식개조 작업을 했다. 과거사위는 군 의문사로 처리됐던 6명 가운데 2명은 보안사 심사를 받는 도중이나 직후에 자살, 녹화사업의 직접적인 피해자로 볼 수 있고, 나머지 4명은 간접적인 피해자라고 밝혔다.
●실미도 사건
그 동안 논란이 됐던 실미도 부대의 창설 경위와 관련, 과거사위는 68년 1ㆍ21사태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주도적으로 창설했다고 밝혔다. 중앙정보부는 부대운영 예산을 지원했고 정기적으로 실미도를 방문해 훈련상태를 점검했다.
과거사위는 또 사형수나 중형을 선고 받은 흉악범들로 알려진 실미도 부대원 31명 가운데 상당수가 장교임관과 미군부대 취직 등을 조건으로 내세운 중앙정보부의 공작원모집에 지원한 민간인이었다고 밝혔다. 훈련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7명 가운데 6명은 탈영을 시도하거나 기간병에게 반말을 ?다는 이유 등으로 살해 당했다.
나머지 1명은 실제 훈련 중 숨진 것으로 조사됐다. 과거사위는 이번 조사과정에서 벽제 공원묘지에 집단 매장됐던 공작원들의 유해를 발굴, 8명의 신원을 추가로 확인하는 성과도 올렸다.
김정곤 기자 jk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