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에 이어 비가 왔다. 다 기른 과실은 땅에 떨어져 못 쓰게 되었고, 염전 바닥에는 진흙이 들어찼으며 소금 창고는 물에 다 젖었다.
그야말로 온 나라가 물난리로 고생한 한 주였다. 그리고 지난 두 주 동안 연재했던 ‘피서지 맛과 맛집’이 어울리지 않는 주말이 시작될 것 같다. 바람과 비 때문에 취재 여행을 떠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피서지 맛…’의 중간 점검. 지난 주까지 정선으로 안동으로 돌면서 장바구니에 담아 온 식재료 이야기를 해보련다. 박목월 선생의 시(詩)를 한 수씩 곁들여서 말이다.
<묵>묵>
“모밀묵이 먹고 싶다…(중략)…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그렇게 이웃끼리 이 세상을 건너고 저승을 갈 때, 보이소 아는 양반 아잉기요 보이소 웃마을 이 생원 아잉기요 서로 불러 길을 가며 쉬며 그 마지막 주막에서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절로 젓가락이 가는 쓸쓸한 음식”
박목월 시인의 ‘적막한 식욕’을 감히 인용해 보았다. 우리네 향토 음식 가운데 가장 향토적인 메뉴가 바로 ‘묵’인데, 특히 시인이 주인공으로 삼은 메밀묵은 묵 가운데서도 가장 서민적이다. 쌀이 귀하고 먹을 것이 없었던 그 옛날에 서민들은 감자나 메밀 등의 ‘구황작물’로 연명하지 않았나. 특히 메밀은 몇 달 만에 부쩍 자라나는 짧은 생육 기간 덕에 시중에 흔히 나왔으므로 돈이 없어도 비교적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식재료였다.
메밀을 맷돌에 갈아서 앙금을 가라앉히고 그걸 풀처럼 쑤어서 만드는 방법이 정통이지만, 이번 정선 5일장에 가보니 ‘묵 가루’라 하여 물 붓고 잘 쑤기만 하면 만들 수 있도록 제품이 나와 있었다. 담담한 음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메밀을 이용한 다양한 요리를 정선 여행의 백미로 꼽았었는데, 메밀을 이용한 국수에 부침개와 묵을 먹다 보면 아침나절인데도 막걸리 생각이 절로 날 정도였다.
그 지루하고 덤덤한 메밀을 또 걸쭉하게 쑤어서 만든 묵은 메밀로 만드는 음식 가운데서도 가장 꾸밈이 없는 맛이다. 메밀국수는 국물 맛이 있고, 메밀 전은 기름 맛이 배어 모양을 부릴 수 있지만 ‘묵은 그냥 묵’일 뿐이다. 요즘에야 먹을 것이 넘쳐서 묵을 툭툭 썰어서 간장에 찍어 먹다 보면, 각종 조미료에 절여진 혀가 오히려 그 심심함을 신선하게 느끼는 세상이 되었지만. 시절이 좋아서 가장 가난하고 서민적이었던 음식이 ‘웰빙 별미’나 ‘다이어트 식(食)’으로 업그레이드 된 셈이다.
이북이 고향인 우리 친가 어른들은 모였다하면 드시는 것이 김치말이나 냉면인데,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가 몇 해 전부터 추가한 메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묵밥.
원래 묵밥은 강원도 음식으로 나는 봉평에 놀러 갔을 때 처음 먹었었다. 가지런히 썬 묵에 닭 육수나 멸치 육수로 국물을 내어 자작하게 붓고 밥 말고 다진 김치 송송 넣어 만든 메뉴를 엄마는 좀 더 이북식으로 만들었다. 사이다처럼 짱짱한 동치미 국물에 기름을 걷어 식힌 양지머리 육수를 섞고 조선간장으로 색만 낸 방법이다. 여기에 밥은 말아도 되고 안 말아도 되지만 메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리 가족들은 밥 보다는 국물을 넉넉히 하고 메밀묵을 듬뿍 넣어 먹는다.
<간 고등어>간>
“(전략)… 윤사월 보릿고개 아배도 알지러요/ 간 고등어 한 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 들이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이나 많이 묵고 가이소.”
역시 박목월 시인의 글인데, ‘만술 아비의 축문’이라는 시다. 너무 가난해서 아비의 제상에 밥이랑 소금만 달랑 올린 아들의 마음이 절절하다. 간 고등어에 막걸리나 한 사발 올렸으면 좋았을 것을, 아비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간 고등어는 ‘자반 고등어’를 안동식으로 부른 것이다. 진짜 안동식 발음은 ‘간 고디이’다.
안동의 임하댐을 우측으로 하고 가다보면 거대한 어물 단지가 나오는데, 거기가 바로 옛날 ‘챗거리 장터’라고 불리던 곳. 안동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인 영덕에서 각종 해산물을 이고 지고 해뜰 무렵 출발을 하면, 저녁이 되어 도착하는 지점이 바로 챗거리 장터였단다. 장터 근방에 살던 사람들까지는 그래서 생물 고등어를 먹을 수 있었지만, 장터에서 더 내륙에 사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장터에서부터 소금에 절여져 운반되는 자반고등어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장터를 출발하여 안동 내륙까지 지게에 지고 가는 동안 고등어는 소금에 아주 적당히 절여져서 안동 내륙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손색이 없었을 터. 간 고등어는 그냥 잘 구워서 먹으면 되는데, 자글자글 기름이 도니까 실고추나 쪽파를 뿌리 듯 곁들이면 색도 맛도 고급스럽다. 무를 바닥에 척 깔고 김치랑 넣어서 맵게 쪄낸 간 고등어 찜은 ‘밥도둑’. 칼칼한 국물이랑 무랑 도톰한 고등어 살점을 한 술에 올려 밥이랑 먹으면 나같이 체구?작은 여자도 밥 한 그릇이 금방 없어진다.
안동에서 사온 간 고등어를 구워 먹고 쪄먹고 하다가 개발한 레서피는 ‘간 고등어 와인 찜’인데, 쿠킹 호일이랑 요리용 와인만 있으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집에 있는 야채랑 고등어 작은 도막을 호일에 올린 다음 호일의 사방 솔기를 주머니처럼 접어 말고 그 안에 와인과 버터를 넣어 쪄내는 거다.
마지막에 후추랑 레몬즙을 더하면 세련된 맛이 난다. 토속 안동 레서피에는 못 미치는 가벼운 맛이지만, 빠르고 간단하게 입맛을 전환하기에는 괜찮다.
EBS 요리쿡 사이쿡 진행자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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