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두고 정권의 안보 불감증을 질타하는 여론이 뜨겁다. 반면 정권은 '구시대의 망령에 사로잡힌' 언론과 국민의 안보 과민증을 공박한다.
불감증과 과민증은 모두 의학용어에서 나왔다. 크게 보아 불감증(Sexual Anesthesia)은 마음의 병이지만 과민증(Hypersensitivity)은 면역계통의 이상이다. 불감증의 원인으로는 수동적 태도, 원초적 죄의식, 약한 체력, 남편의 일방통행, 악몽 같은 사건 등이 지적된다.
그것이 마음의 병에 그치지 않고 만성 소화불량이나 변비 등 육체적 고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과민증은 약리작용에 따른 과민증상을 제외하면 과잉 면역반응이 대부분이다. 외부 자극(항원)에 대한 반응(항체)이 과도할 때 나타나는 이상 증상인 알레르기가 바로 과민증이다. 고통의 내용과 성질이 전혀 다른 둘을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큰지를 잴 수는 없다.
● 과민증은 안보의 기본요구
이와 달리 안보 불감증과 과민증은 어느 쪽이 더 심각한지를 진단할 수 있다. 같은 자극에 대한 양 극단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얼마든지 비교가 가능하다.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어느 쪽이 도움이 되느냐는 판단 기준도 명확하다.
북한 미사일이 어떻게 안보 위협이 아닌 단순한 정치 문제인가. 미사일은 현대전에서 무기체계의 핵심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행위자의 의도다. 북한이 다양한 사정거리의 미사일 시험 발사로 한국과 일본, 미국에 대한 동시타격 능력을 과시하려 했다면, 남한에 대해 '안보 위협'을 제기하려는 분명한 의사가 있었다.
설사 미국에 대한 위협이 '절반의 실패'로 끝났고, 일본에 대한 위협도 '군사대국'을 겨냥한 일본의 과잉 반응에 의해 과장된 것이더라도, 한국에 대한 위협만은 관철됐다. 무엇보다 심심하면 나오는 '불바다' 발언에서 보듯, 이미 북한의 가장 유력한 '안보 볼모'가 돼 있는 스스로의 처지를 부인할 수는 없다.
안보는 현존하는 명백한 위협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원전사고처럼 거의 무의미한 확률에도 대비하는 것이다. 대비하면 위기 발생 확률이 낮아지고, 불감증이면 확률이 급히 높아진다. 따라서 진정한 안보 의식은 늘 과민증을 요구한다.
그런데도 정권은 안보 과민증을 문제로 삼았다. '과거'를 주된 적이자 청산 대상으로 삼고, 그 중에서도 군사독재 시대를 표적으로 설정한 이상 안보 위협을 인정하는 데 반사적 거부감을 느꼈을 만하다.
그러나 환경이 크게 바뀌었는데도 과거의 조건반사를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군사 독재'와 '개발 독재', '안보 독재', '반공 독재' 등이 서로 밀고 당기며 국민생활을 지배하던 때가 있었다.
이런저런 '○○독재'만 있었던 게 아니다. 전교조 태동기에 '참교육' 서명 운동이 번지면서 그에 대한 노골적 색출ㆍ탄압이 행해졌다. 그 때 서울의 한 중학교 교사는 우연히 교육당국이 내려보낸 '지침'을 읽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난히 수업에 열심인 교사,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은 교사를 주의해서 살피라는 내용이었다.
그 정도로 당시 '참교육'의 의미는 컸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눈길로 전교조 교사들을 바라보려는 사람은 드물다. 이미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잣대이기 때문이다.
● 과거의 잣대 이젠 버랴야
안보 인식을 따지는 잣대도 다르지 않다. '안보 독재'가 존재했던 20년 전에는 안보 의식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국민생활과 사회 발전을 위한 길일 수 있었다. 반면 '안보 독재'가 사라진 지금 그런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시대착오다. 이만큼 민주화를 끌고 온 국민의식의 변화를 부인하는 파렴치한 배신 행위다.
의학적 불감증 치유는 배우자의 따스한 배려가 최고다. 진정한 사랑을 전할 수 있을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이를 유추하면 정권의 안보 불감증도 행위 상대방인 북한의 인내심 깊은 진의 전달 노력으로만 고칠 수 있다. 그런데 그 진의 전달이 결국 더욱 강한 위협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안 그래도 민감한 국민의 불안과 분노를 자극한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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