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맨발로 나무에 기어오른다. 오직 순수한 즐거움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흥미롭다. 새롭다. 물론 다소의 위험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전에는 결코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다가가는 짜릿한 모험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 아이는 거대한 바위로 갈 것이다. 이제는 게임이 복잡해진다. 암벽화와 자일 그리고 하켄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전히 모험이라는 요소는 똑 같다. 맨발로 나무에 오르던 시절의 흥분과 즐거움을 여전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에 출간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30여년 동안이나 전세계 암벽 등반가들이 교과서처럼 읽어온 ‘기초 암벽기술’(1971)의 한 구절이다. 이 책은 이태 후에 나온 ‘진보된 암벽기술’(1973)과 더불어 이미 ‘현대의 고전’이 되었다. 단순히 암벽등반에 필요한 기술들을 열거해 놓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은 암벽등반의 태생과 지향점 그리고 철학과 윤리를 극히 단순하나 분명한 어조로 만천하에 공표했다. 저자인 로열 로빈스(71)는 말한다. “그것은 소년이 나무에 오르는 것과 같다. 즐거운 놀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이 놀이에도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
1935년 미국의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로빈스는 10대 후반부터 암벽등반에 심취했다. 그는 18세 때 미국 최초의 5.9급 루트로 꼽히는 타퀴즈록의 ‘오픈북’을 선등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로빈스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놀이터’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이었다. 그는 거벽등반 기술을 스스로 고안해내고 직접 적용시키는 일에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쳤다. 지식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두터운 뿔테 안경을 쓰고 자신이 올라야할 바위를 골똘히 연구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거벽의 철학자’라고 불렀다.
로빈스는 ‘요세미티 등반의 황금기’를 온몸으로 구현한 거벽등반가 그룹의 대표주자였다. 1957년의 하프돔 북서벽 초등, 1961년 살라테 월 초등, 1964년 엘캐피탄 노스 아메리칸 월 초등, 1968년 엘캐피탄 단독초등 등은 등반사에 길이 남을 영광의 기록들이다. 그는 또한 요세미티식 인공등반 기술을 알프스의 거벽에도 여지없이 적용시켜 유럽 산악인들의 입을 쩍 벌려놓은 장본인이다. 그가 1962년에 알프스 프티 드뤼 서벽에 다이렉트 루트를 뚫고 다시 3년 후에 수퍼 다이렉트 루트까지 만들었을 때 ‘늙은 대륙’ 유럽의 자존심에는 회복할 수 없는 금이 갔다. 천박한 신생공화국의 히피들이 몰려와 유럽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등반기술을 구사하며 알프스의 거벽을 초등했으니 경악할 만도 하다.
로열 로빈스의 등반경력은 이렇듯 화려하다. 전통적으로 미국인들을 얕잡아 보는 유럽의 등반사에서도 결코 지울 수 없는 이름이 로열 로빈스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자신이 등반가로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자평한다. “저는 최고의 등반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대목이다. “저는 제 능력의 최고점에 도달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가 원했던 것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제 주변에는 언제나 저보다 뛰어난 등반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제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등반들을 멋지게 해치웠습니다.”
그는 겸손하다기보다는 냉철한 사람이다. 균형 잡힌 시각과 열린 마음을 가졌다. 그는 ‘최고의 등반가’가 되려고 했던 자신의 목표가 ‘잘못 되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런 목표는 자신을 불만에 빠뜨립니다. 보다 훌륭한 목표는 ‘우정’과 ‘즐거움’이죠. 이제 목표를 그렇게 수정하니 삶이 훨씬 더 ‘즐길만한 어떤 것’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이룬 요세미테의 초등기록들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평가한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당시에는 대단한 등반능력이 없어도 초등할 수 있는 바위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으니까요.”
40대에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그는 이후 히피와 다름 없었던 예전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아내와 더불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 아웃도어 의류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업체인데, 회사의 브랜드 자체가 ‘로열 로빈스’다. 처음에는 구멍가게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연간 매출액이 천만 달러를 훌쩍 넘어서는 견실한 기업이 되었다. 그가 귀띔해주는 사업의 성공비결조차 단순하기 그지 없다. “목표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거죠. 중요한 것은 잘할 수 있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겁니다. 업적이란 집착하지 않을 때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어요.”
로빈스는 50대 이후 등반보다는 카약을 즐긴다. 그 이유가 지나치게 솔직하면서도 명쾌하다. “카약에는 엄청난 기술을 소유하지 않고도 최초로 행할 수 있는 영역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마치 60년대의 제가 요세미티를 개척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죠. 게다가 육체적으로도 좀 더 수월하고.” 로열 로빈스를 생각하면 언제나 맨발로 나무에 오르는 개구쟁이 소년이 떠오른다. 중요한 것은 업적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면서 더 없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독보적인 업적과 사업적인 성공은 다만 그 즐거운 여행의 부산물일 뿐이다.
산악문학작가
■ "볼트 남발은 등반윤리 훼손" 워렌 하딩과 대립
요세미티 등반의 황금기에는 두 명의 거인이 있다. 바로 워렌 하딩과 로열 로빈스다. 두 사람은 등반 스타일과 성격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워렌 하딩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거벽에 볼트를 때려 박으며 올랐다. 로열 로빈스는 그것이 자연은 물론이거니와 등반윤리 자체를 훼손하는 파렴치한 짓이라고 여겼다. 그는 바위에 때려 박는 볼트 대신 바위 틈새에 끼워 넣는 너트의 사용을 적극 옹호했다.
워렌 하딩은 1970년, 300개의 볼트를 때려 박으며 요세미티의 '다운 월'(일명 '월 오브 더 얼리 모닝라이트')을 초등했다. 로열 로빈스는 그 직후 같은 루트를 오르며 워렌 하딩이 박아놓은 볼트들을 몽땅 제거해 버렸다. 볼트는 자연을 훼손할 뿐 아니라 등반의 즐거움을 감소시키고 루트의 가치 자체를 하락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루트의 상단부에서는 볼트를 제거하지 않았다. 그것이 난이도 때문이었는지 태도의 변화 때문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로써 극적으로 촉발된 등반윤리 논쟁은 1970년대 세계 산악계 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여론은 로열 로빈스 편으로 기울었지만 워렌 하딩은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훗날 로열 로빈스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원숙한 태도를 보였다. "다운 월에서 하딩의 볼트를 제거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던 거지요. 하딩의 등반철학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길을 가고, 저의 등반철학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길을 가면 되는 거지요. 논쟁을 벌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대신 초연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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