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지만 세계 어디서나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뉴욕 브로드웨이나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으면 좋겠어요.”
지난달 타계한 극작가 차범석 선생의 ‘산불’을 뮤지컬로 각색한 세계적인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64)이 한국을 방문했다. 내년 7월 무대에 오르는 창작 뮤지컬 ‘댄싱 섀도우’제작발표회에 참석하기 위해 10년 만에 방한한 그는 “한국은 라틴아메리카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민주화 과정을 겪어 언제나 깊은 형제애를 느낀다”며 “‘미스터 차’가 없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훌륭하고 감동적”이라고 방한 소감을 밝혔다.
카를로 푸엔테스, 이사벨 아옌데 등과 함께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세계 문학의 중심부에 정립시킨 그는 1942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10년 후 가족과 함께 칠레로 돌아갔지만 아옌데의 민주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피노체트 군부 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았고, 10년 넘는 망명생활 끝에 1985년 미국 듀크대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소설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와 ‘죽음과 소녀’ 등의 희곡으로 이미 현대문학사에 깊은 날인을 새긴 그이지만, 뮤지컬 각본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 “한 번도 안 해본 일이라 큰 도전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집에서 어딜 나갈 때도 늘 다른 길로만 다니거든요.” 뉴욕에서 자란 꼬마시절부터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뮤지컬을 보며 자랐고, 항상 뮤지컬을 사랑했다는 그는 “뮤지컬은 음악과 가사, 춤, 배우들이 다 같이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에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희곡이 두 시간짜리 대화라면 뮤지컬은 1시간 40분간 노래하고 춤추고, 나머지 2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동안 짧은 대사 안에 모든 걸 표현해야 합니다. 나는 원래 에둘러 말하는 화법의 소유자지만, 이젠 뮤지컬 스타일에 맞춰 직설적으로 말하는 버릇을 들여야 해요. 그 점이 가장 어렵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뮤지컬이 좋습니다.”
도르프만과 ‘산불’의 만남은 그가 아르헨티나에 머물던 2003년에 이뤄졌다. “한국에서 보내온 ‘산불’의 희곡을 읽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더구나 한국 작품이라니…, 꼭 해보고 싶었죠. ‘몇 가지만 바꾸면 딱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원작자가 마음에 걸렸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차 선생님이 ‘노 프로블럼’(No Problem)이라며 흔쾌히 승낙해줬어요. ‘산불’이 뮤지컬로 만들어지는 걸 보는 게 그분 소원이었는데, 여기 안 계셔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해서 차범석의 ‘산불’은 마술적 요소가 강한 러브스토리 ‘댄싱 섀도우’로 재탄생하게 됐다. 음악을 맡은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에릭 울프슨과도 두 시간 만에 작품 이야기를 마칠 정도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도르프만은 소백산맥의 과부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삼각 사랑과 이념 대립을 동화(fairy tale) 스타일로 바꾸기 위해 중세 아랍과 발칸 반도에서 지명과 인명 등을 차용했다.
“원작은 철저한 리얼리즘에 입각해 있는 작품이죠. 하지만 리얼리즘 뮤지컬이란 건 없어요. 뮤지컬의 특성상 리얼리즘을 탈색시킬 필요가 있었죠. 동화로 바꾼 건 세계 시장에 내놓았을 때 전세계 어디서나 공감을 얻기 위해서예요. 그런 점에서 ‘댄싱 섀도우’는 한국적인 작품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댄싱 섀도우’를 원작과 똑같이 만들려고 하면 내가 왜 필요하겠습니까.”(웃음)
사진 신상순기자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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