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농(農) 공(工) 상(商) 이미지를 완전히 떨쳐 버려야 겠죠.”
지난달 8일 서울 모 여고에선 특성화고(지방자치단체 산업체 정부부처가 협약에 따라 학교 운영에 직접 참여하고 재정을 지원함으로써 지역 특화산업, 국가 기간산업 분야의 맞춤형 실무 인력을 양성하는 학교) 교장단 모임이 열렸다. 이날 오간 대화는 주로 ‘어떻게 하면 우수한 신입생을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교장들은 “분명한 건 세상이 변하고 있고, 실업 교육도 그에 맞춰 혁신을 꾀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농고 상고 공고’로 대변되는 실업고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일부 학교는 수십 년 전통과 명성을 상징해 온 교명까지 바꾼다. 학과는 산업수요의 변화를 적절히 반영하는 방향으로 바꾸고 대학 진학이나 유학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 '특성화' 넘어 '유학' 주도까지
서울 용산구 청파동 선린인터넷고 유학반엔 현재 3학년 13명, 2학년 25명이 미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다. 지난해 이 학교 유학반 학생 14명은 미국 중상위권의 주립대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증을 거머쥐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14명의 학생 모두 자기 전공을 살려 ‘컴퓨터 사이언스’나 정보 관련 학과로 진학했다는 점이다.
컴퓨터 국제공인 자격증을 취득한 후 입학 가산점을 받아 일종의 특별 전형을 거쳐 들어갔다. 천광호 교장은 “대학 학력이라는 메리트보다는 원래 하고 있던 공부에 욕심이 생겨 유학을 떠난 학생들”이라며 “학교는 ‘멍석’만 깔아줬을 뿐”이라고 말했다.
전통적인 실업고 이미지를 벗고 특성화고로 바뀌는 실업고도 많다. 서울만 해도 6곳이 내년부터 특성화고가 된다. 예일여자실업고 세명컴퓨터고 등이 각각 디자인과 컴퓨터 시스템 분야의 전문화를 내세우며 예일디자인고와 서울디지털과학고로 ‘얼굴’을 바꾼다.
인문고로 전환하는 학교들도 있다. 서울 보인정보산업고(옛 보인상고)는 2007학년도부터 인문계 신입생을 받는다. 특성화고인 덕수정보산업고(옛 덕수상고)는 덕수고로 명칭을 바꿔 인문계열와 특성화계열을 동시에 모집한다.
■ 변화는 어디에서 왔나
변화의 배경엔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갈수록 신입생 유치는 어려워지고 있으며, 단순히 ‘졸업=취업’이라는 공식은 깨진 지 이미 오래다. 취업이든 진학이든 학생에게 실무 능력을 전수하고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들다는 위기 의식이 공유되고 있다.
실업고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학생 감소와 높아진 학생들의 진학욕구 등을 몸소 겪어야 했다. 졸업 후 취업자는 1990년 21여만명에서 2005년 4만여명으로 준 반면, 진학률은 8.3%에서 67.6%로 60% 포인트 가까이 껑충 뛰었다.
졸업자의 눈이 높아졌다고 탓할 것은 아니다. 기업에서 원하는 수요도 급감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전통적 실업교육에 대한 수요는 대기업의 경우 1995년 5만9,000여명에서 2003년 1만9,000여명으로, 중소기업은 15만6,000여명에서 10만1,000여명으로 감소했다.
산업구조는 지식집약형으로 바뀌고 있지만 실업고 진학자의 평균 자질 하락이나 중소기업 기피 등이 맞물려 기존 교육체계에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왔다. 실업고들은 이런 요구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 새로운 상 만들어야
실업고의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둘로 나눠진다. 하나는 중등 직업 교육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내고 이제야말로 본격적인 적성ㆍ소질 위주의 교육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찬성론이다. 다른 하나는 직업 교육 대신 대학입시 쪽으로 가고 있다는 반대론이다. 전국교직원노조 관계자는 “특성화고로 지정된 S고의 경우 본분의 기능교육보다는 입시에 치우쳐 상급학교 진학률이 82.7%에 이른다”며 ‘직업계열 신(新)입시명문고’의 등장을 우려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현재 76개인 특성화고를 2010년까지 200개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지만 현장에선 “이름만 바꾼다고 다 되냐” “구체적인 예산 지원 계획을 세우라”는 비판도 여전하다.
그러나 직업능력개발원 이용순 직업교육ㆍ산학협력연구본부장은 “실업고의 정체성은 학생과 산업체의 요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며 “실업고는 취업과 진학을 동시에 준비시키는 교육기관으로 성격을 확고히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원기 기자 one@hk.co.kr
■ 女商 → 컨벤션고… 우수학생 '우르르'
이민지(17)양은 국제회의 통역사가 꿈이다.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며 세계 저명 인사를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때 이양이 고심 끝에 선택한 학교는 인문고가 아니라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해성여상이었다.
해성여상은 1월 컨벤션(국제회의ㆍ전시회 기획) 분야 특성화고로 지정됐으며, 서울시교육청의 승인이 나오면 해성국제컨벤션고로 교명도 바뀐다. 현재 컨벤션영어과 1학년으로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양은 “일반 인문고에 가서 적성과 상관없는 과목까지 공부하느니 차라리 내 꿈을 가장 빨리 이룰 수 있는 길을 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해성여상은 1961년 개교 이래 최근까지 상업 분야의 실업고였다. 정보통신(IT) 바람이 불면서 기존 학과에 전산 개념을 더한 ‘인터넷 비즈니스’나 ‘디지털 정보처리’ 관련 학과를 신설, 운영해 왔다. 그러나 세상도, 학생도 변했다. 지식기술 산업은 발전하고 있는데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상고라는 틀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꾀할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학교가 내린 결론은 컨벤션 분야 특성화고였다. 우리나라에서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총회 등 대규모 국제행사 개최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지만 이를 산업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학교는 거의 없다. 이 분야는 현재 4년제 대학이나 전문대조차 걸음마 수준이다.
학교 이름이 바뀌는 2007학년도부터는 정식으로 컨벤션영어과 컨벤션경영과 국제전시경영과 등 3개 학과 신입생을 모집하게 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우수 학생이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특성화고 지정에 앞서 1년 일찍 설립 인가를 받은 컨벤션영어과의 경우 성적이 상위 2.9%인 학생이 들어왔고, 평균 성적도 상위 21%에 이른다. 인터넷 입학 상담 게시판도 뜨겁다. 정양현 교장은 “우리가 학생을 뽑을 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성적이 아니라 적성”이라고 강조했다.
박원기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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