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원회)가 1차로 조사대상자를 확정했다. 그리고 법에 따라 직계비속이나 이해관계자가 존재하는 39명을 제외한 81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전체 친일행위자 가운데 1904년부터 1919년 사이의 친일행적이 확인된 자, 곧 매국ㆍ수작자, 중추원 관련자, 일진회 관련자, 한일합병을 적극 지지한 자 등 일부가 조사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게다가 아직 이의신청 절차가 남아 있다. 곧 조사대상의 확정이지 친일반민족행위의 확정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국가기관이 처음으로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선정했다는 점에서 반민규명위원회의 이번 발표는 의미를 갖는다. 국가가 민족의 정통성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는 데서도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번 1차 조사대상자 확정은 친일청산을 위한 작은 출발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세기 이상을 기다린 끝에 많은 사람의 염원을 담아 시작된, 힘찬 첫 걸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그 동안 친일문제를 청산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8ㆍ15 직후만 해도 친일파를 척결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열망을 담아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고 반민특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친일문제의 청산을 가로막았다. 국가권력에 의해 반민특위는 곧 좌초되고 말았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친일세력이 지배세력으로 계속 군림하는 길을 열었다. 이들에 의해 친일문제는 더 이상 거론될 수 없었다.
친일문제가 다시 등장한 데는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과정이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친일문제를 포함한 잘못된 과거사의 청산이 몇 해 전부터 공론화되기 시작하더니 작년 반민규명위원회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반민규명위원회 앞에는 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다. 친일청산은 철저하고도 객관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피의자도 증언자도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여러 가지 이유로 관련자료는 멸실되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큰 힘을 갖고 있는 후손과 연고자의 반발이다. 이는 이미 반민규명위원회 출범 이전에 드러난 바 있다.
친일청산에 대한 반발에는 일제 하를 살았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친일행위를 했다는 전민족 공범론, 친일청산을 말하는 자는 빨갱이라는 색깔론, 친일은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것이었다는 친일민족주의론 등 수많은 궤변이 동원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친일청산은 결코 특정 개인의 법적, 정치적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마 해방 직후였다면 그러한 방식의 청산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본만 해도 패전 직후 전쟁책임과 관련해 2만명 이상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법적, 정치적 청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유실되었고 그것을 다시 추진할 만한 여유도 현재의 우리에게는 없다. 따라서 친일청산이란 역사적 진실을 올바로 기록하고 이를 통해 민족정기를 확립하는 데 주안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의 발표는 이를 위한 작지만 힘찬 첫 걸음이다.
이준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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