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1월 15일 저녁 6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열세 살 생기가 풋풋한 소녀는 배드민턴 지역대회를 앞둔 특별훈련을 끝내고 친구들과 함께 학교 문을 나섰다. 집에 가면 아빠 엄마에게 부쩍 는 배드민턴 실력을 자랑해야지, 개구쟁이 쌍둥이 남동생들과는 뭘 하고 놀아줄까….
● 메구미 부모의 미소와 절제력
소녀는 그러나 다시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집 근처 횡단보도에서 친구들과 헤어진 후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 알 수 없는 남자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배에 태워졌기 때문이다. 울다가 지쳐버린 어린 소녀는 죽음보다 무서운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가족들을 생각하며 긴긴 밤을 견뎌냈다.
소녀가 거짓말처럼 사라지자 부모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받았다. 해맑은 미소로 언제나 집안을 환하게 했던 장녀의 실종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딸이 사고를 당해 깊은 산에 암매장되는 등 악몽을 꾸기도 했지만, "죽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고 소리치며 마음을 다잡았다. 백방으로 딸을 찾아 다닌 어머니는 기독교에 귀의해 간절한 기도의 나날을 보냈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의 납치 당시 상황을 부모의 증언을 바탕으로 정리해 본 것이다. 메구미의 아버지 시게루씨와 어머니 사키에씨가 딸의 납북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로부터 20년 뒤의 일이다. 한 순간도 딸을 포기하지 않았던 부모들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오히려 하늘을 날 듯 기뻤다고 한다. 메구미가 살아있다는 자신들의 굳은 믿음에 대해 하늘이 장하다고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취재수첩에 기록하며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정말로 견디기 힘든 비극을 30년 가까이 가슴 속에 품은 채 살아온 노부부에 대한 연민과 감동의 눈물이었다. 올해 73세의 시게루씨와 70세의 사키에씨 부부는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당신들이 보여주는 온화한 미소와 강인한 절제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고. 지난해 지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시게루씨는 "그것이 우리 딸을 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대답했다. "딸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딸을 구해내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의미"라고도 말했다. 최근 부부는 딸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할 수 있었던 납북자 김영남씨 모자 상봉에 대해서도 "만남은 정말로 잘 된 일"이라며 축하했다.
● 한일 정부 인도적 관점 가져야
북한의 각본이 물씬 느껴진 김영남씨 가족 상봉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묵과할 수 없는 납치라는 반인륜적인 범죄는 온통 비본질적인 것들로 채색돼 변질되고 있는 양상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우리가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다시 원점에 서서 냉정하게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것은 납치 문제가 오늘도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문제이고, 우리도 같은 인간으로서 지나쳐버릴 수 없는 인도주의적 문제라는 것이다. 당사자들인 한국과 일본 정부도 복잡한 정치적 계산은 던져버리고, 인도적 관점에서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김철훈 도쿄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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