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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바둑의 '영원한 國手' 조남철 9단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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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바둑의 '영원한 國手' 조남철 9단 타계

입력
2006.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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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별세한 조남철 9단은 한국 바둑이 세계 정상에 오르는데 기초를 닦은 영원한 바둑인이다.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기원 프로기사가 된 그는 44년 귀국해 이듬해 11월 ‘기도보국‘(棋道報國)의 원대한 뜻을 품고 서울 남산동에 한성기원을 설립했다.

내기바둑을 금하고 바둑을 건전한 국민오락으로 보급하며 국제 시합에 대비, 한국식 순장바둑을 현대 바둑으로 대체하는 등의 원칙을 내세우고 출발했지만 사회적 여건이 미비하던 때라 숱한 난관에 부닥쳤다.

변변한 후원자가 없었던 한성기원은 이후 조선기원, 대한기원, 사단법인 한국기원, 재단법인 한국기원 등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68년 종로구 관철동에 한국기원회관이 건립될 때까지 열 여섯 차례나 이삿짐을 싸야 했다.

그런 고생 때문이었는지 그는 한국기원회관 기공식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일본 유학시절 이국 생활의 서러움에 눈물 흘렸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대한기원이 쑥대밭이 된 뒤 바둑판과 바둑돌을 주워 모으면서 눈물을 흘린 그가 이번에는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회고록의 부제를 ‘세 번의 눈물’로 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실력에서도 당대의 최고수였다. 56년 창설된 국수전은 초대 대회부터 9연패했고 최고위전은 7연패했으며 초대 명인에 오르는 등 후배 김인 9단이 등장하기까지 우리나라 바둑계의 1인자로 인정 받았다. 바둑인 사이에서 대국 도중 “조남철 9단이 와도 못 이겨.” “조남철 9단이라면 몰라도….” 라는 말이 돌 만큼 그는 바둑의 대명사가 됐다.

국제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60년대 일본은 현대 바둑의 종가를 자처하면서 우리나라는 도외시하고 중국과의 교류에만 관심을 두었는데 이때 그는 비록 굴욕감은 없지 않으나 장차 일본을 이기려면 선진 기술을 배워야 한다며 한일 바둑교류의 물꼬를 텄다. 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자 그 해 12월 한국기원에서 제1회 한일 대학생 친선 바둑 대항전을 열었고 이후 한일 고교생 바둑대회, 한중일 동양 3국 고교생 대회 등으로 확대했다.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조치훈 등 젊은 기재들이 선진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일본 유학을 적극 지원해 훗날 한국 바둑의 수준이 향상되고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최초의 바둑교재 ‘위기개론(圍碁槪論)’(55년)를 비롯해 ‘행마의 기초’ ‘행마의 급소’ 등 바둑책을 출판하고 한국식 용어가 정착하는 데도 기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충순(80) 여사와 딸 영수(54), 영민(51)씨, 아들 송연(49)씨 등 1남 2녀가 있으며 조치훈 9단이 조카다. 장례는 한국기원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5일 오전. (02)3410-6915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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