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시장이 내달 1일 출범 10주년을 맞는다. 1996년 7월1일 지수 1000으로 시작한 코스닥시장은 정보기술(IT) 경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2000년 3월10일 2834.40포인트로 고점을 찍었으나, 이후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현재 550선 안팎에 머물고 있다. 고점 대비 5분의 1 토막이 난 셈이다. 코스닥시장 10년간의 풍파는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들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2000년 당시 벤처 열풍에 힘입어 성공 신화를 일궜던 스타 CEO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1999~2000년 최저가 대비 주가상승률 상위 9개 벤처기업 CEO들의 근황을 조사한 결과, 총 9명 중 절반 이상인 5명이 주가조작 등으로 형사 처벌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주가상승률 상위 업체는 리타워텍(20,123%), 한국디지탈라인(9,349%), 새롬기술(옛 솔본ㆍ6,669%), 싸이버텍(3,963%), 다음(3,529%), 터보테크(3,364%), 장미디어(3,359%), 코리아텐더(옛 골드뱅크ㆍ3,236%), 버추얼텍(2,646%), 핸디소프트(2,620%) 등이다. 이 중 리타워텍과 한국디지탈라인은 시장에서 퇴출됐다.
이들의 인생 역정은 코스닥시장의 우여곡절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가장 흔한 유형은 대박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다 결국 나락으로 떨어진 ‘몰락형’이다. 정현준 한국디지탈라인 사장, 장흥순 전 터보테크 대표는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며, 오상수 전 새롬기술 사장도 영어의 몸이 됐다가 지난해 말 형기를 마쳤다. 허록 전 리타워텍 대표와 김진호 전 골드뱅크 사장도 허위사실 공포와 횡령 혐의 등으로 집행유예 형을 받았다.
이밖에 회사 몸집 불리기로 거액의 시세 차익을 챙긴 ‘먹튀형’, 코스닥 등록을 통해 엄청난 자금을 확보한 뒤 다른 산업으로 눈을 돌린 ‘외도형’, 옛 영화를 되찾으려는 ‘와신상담형’, 회사를 별 탈 없이 유지해 온 ‘건재형’ 등 스타 CEO들의 유형은 다양하다.
벤처 스타에서 범죄자로, ‘몰락형’
장흥순 전 터보테크 대표와 김형순 전 로커스 사장, 오상수 전 새롬기술 사장, 정현준 한국디지탈라인 사장, 장성익 3R 회장 등이 대표적인 ‘몰락형’이다. 이들은 벤처 붐에 편승해 무리한 사업확장을 거듭하다가 거품이 꺼지자 담보대출을 위한 회사자금 횡령과 분식회계 등의 유혹에 빠진 케이스이다. 벤처기업협회 회장을 역임한 장흥순씨는 올해 5월 700억 원대의 분식회계를 저지른 사실이 드러나 징역 2년6개월을 선고 받았다. 김형순씨도 최근 수익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595억원 대의 분식회계를 한 혐의로 구속됐다.
인터넷 무료전화 붐을 일으켰던 오상수씨는 2001년 유상증자를 앞두고 회사가 흑자가 난 것처럼 허위공시를 했다가 2년6개월 동안 영어의 몸이 됐다. ‘정현준 게이트’의 장본인인 정현준씨는 동방ㆍ대신금고 불법대출, 회사자금 횡령 등으로 2,300억원을 빼돌려 징역 9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다. 서울대 역사상 최연소(28세) 박사학위를 받은 뒤 디지털영상 솔루션 업체를 차린 장성익씨도 최근 자회사인 현대시스콤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는데도 흑자전환 공시를 한 뒤 주식을 대량 매도한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관심, ‘먹튀형’
최유신 전 리타워텍 회장과 김진호 전 골드뱅크 사장은 ‘먹튀형’에 속한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출신인 최씨는 2000년 1월 보일러 송풍기 제작업체인 파워텍 인수를 시작으로 IT업체들을 속속 자회사로 편입시켜 몸집을 불렸다. 리타워텍 주가는 최씨의 후광효과로 352만원까지 치솟았지만 거품이 붕괴되면서 20원까지 추락했다. 회사를 넘기는 대가로 리타워텍의 주식을 받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최씨는 주가조작 혐의를 받았지만 법적 공방 끝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는 이후에도 국내 최대 영화제작사 싸이더스를 우회 등록하는 방식으로 인수하는 등 왕성한 식욕을 보였으나, 최근 투자지분을 파는 등 한국철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진호씨는 98년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발상으로 벤처계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하지만 주가조작 혐의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2002년 돌아와 집행유예 형을 받았다. 김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신코퍼레이션, 아이빌소프트 등을 인수해 회삿돈을 쌈짓돈 쓰듯 하다가 횡령 의혹이 일자 또 다시 해외로 달아났다. 김씨가 경영했던 회사는 리타워텍과 함께 주식시장에서 ‘망령’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만큼 사건 관계자들에겐 악몽으로 남아 있다.
배보다 배꼽이 크네, ‘외도형’
외도형에는 서지현 버추얼텍 대표가 꼽힌다. 서씨는 무선 인트라넷 솔루션 ‘조이데스크’를 개발해 한때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실적이 따라주지 않자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2004년 인터넷 경매사이트 와와컴을 인수해 쇼핑몰 사업을 벌이는가 하면, 제지회사인 페이퍼코리아(옛 세풍)를 인수하는 등 본업보다는 부업에 열중했다. 서씨는 버추얼텍 지분을 담보로 선물옵션에 투자해 30억원의 손실을 보기도 했다.
탕아 돌아오다, ‘와신상담형’
이민화 전 메디슨 회장과 이찬진 전 한글과 컴퓨터 사장, 김영삼 전 아이러브스쿨 사장은 ‘와신상담형’에 속한다. 이민화씨는 지난해부터 휴대폰 등으로 당뇨를 체크해 주는 헬스피아의 경영고문으로, 이찬진씨는 포털사이트 드림위즈 사장으로 재기를 꿈꾸고 있다. 김영삼씨는 100억원을 투자자에게 떼인 뒤 올해 초부터 아파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상거래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비록 벤처 1세대 상당수가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이재웅 다음 사장, 변대규 휴맥스 사장, 안영경 핸디소프트 고문, 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처럼 회사를 알토란으로 키워 온 ‘건재형’도 있다.
기획취재팀= 고재학(팀장)ㆍ유병률ㆍ안형영기자 news@hk.co.kr
■ 6년전 시가총액 상위 20개 기업은 지금…
외환위기로 제조업 위주의 전통산업이 초토화했던 1990년대 말, 인터넷 전화업체 새롬기술의 등장은 한국 경제의 희망이었다. 이 회사는 99년 10월 공짜 국제전화 ‘다이얼패드’로 대박을 터뜨려 주가가 한때 액면가(500원)의 640배인 32만원, 시가총액은 3조7,000억원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다이얼패드의 수익모델이 흔들리고 분식회계 혐의가 드러나면서 나락의 길로 빠져, 현재 주가는 최고가의 90분의 1 수준인 3,000원 선 후반에 머물고 있다. 시가총액도 약 1,000억원으로 37분의 1 토막이 났다.
코스닥 거품 붕괴 6년 여가 지난 지금, 당시 수많은 벤처 스타기업들이 이름도 없이 사라지거나 쪼그라들었다. 재벌을 흉내내며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돈놀이에 몰두하거나 분식회계로 주가를 떠받치다가 예고된 역풍을 맞은 것이다.
본보 취재팀이 코스닥시장 출범 10주년을 맞아 지수가 최고점(2,834.40포인트)에 달했던 2000년 3월10일 시가총액 상위 20개 기업의 현재 주가(6월29일 기준)를 조사한 결과, 아직 코스닥에 남아있는 12개 기업 중 7개 기업의 주가가 90% 이상 폭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70% 이상 주가가 급락한 기업도 10개나 됐다.
당시 시가총액 1위였던 평화은행은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이 대거 부실화하면서 정부의 전액감자 명령을 받아 코스닥시장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또 시총 7위와 19위였던 드림라인과 오피콤은 주가 폭락 등으로 거래가 정지 됐고, 시총 3위와 9위였던 한솔엠닷컴과 로커스는 각각 KTF, 벅스에 인수ㆍ합병됐다.
수많은 스타기업을 나락으로 빠트린 것은 분식회계의 유혹이었다. 실제 기업가치보다 고평가된 주가를 지탱하기 위해 ‘회계 분칠’ 만큼 손쉬운 게 없었기 때문이다. 벤처업계의 맏형이었던 로커스는 작년 10월 분식회계와 이에 따른 자본 전액감식으로 거래정지를 당한 이후 올 3월 증시에서 퇴출위기에까지 몰렸으나, 벅스가 인수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수익성이 계속 떨어지자 본업보다 굴뚝기업 인수나 부동산 투자로 사업을 영위하는 벤처기업도 많다. 소프트웨어 회사 버추얼텍은 올해 초 계열사 페이퍼코리아를 통해 재활용신문지 수입사업을 시작했다. 벤처 거품이 꺼진 이후 매년 매출 30억원에 턱걸이할 정도로 실적이 나빠진 탓이다. 일부 벤처기업은 작년부터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부동산건설, 임대업을 사업목적에 추가하기도 했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벤처 스타기업들의 붕괴는 표면적으론 주가의 붕괴이지만, 실상은 기술개발의 경쟁력 강화보다 눈 앞의 주가와 수익모델에만 탐닉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기획취재팀= 고재학(팀장)ㆍ유병률ㆍ안형영기자 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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