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월드컵이 심판들에게 ‘죽음의 무대’가 되고 있다. 잇따른 오심으로 스스로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면서 월드컵 이후를 기약할 수 없는 심판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지난 23일(한국시간) 호주와 크로아티아의 경기에서 한 선수에게 옐로카드 3장을 준 영국인 그레엄 폴 주심은 30일 국제경기 심판 은퇴를 선언했다. 폴 주심은 “당시 나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었다”면서 “심판은 그라운드에서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27일 브라질과 가나의 16강전 심판을 맡은 루보스 미첼(슬로바키아) 주심은 ‘유니폼 스캔들’에 휘말렸다. 미첼 주심이 경기 직후 호나우두에게 유니폼을 달라고 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심이 호나우두의 유니폼을 얻기 위해 브라질에 유리하게 판정했다”는 가나 축구팬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FIFA의 단호한 입장은 심판들을 더욱 난감하게 하고 있다. 독일의 마르쿠스 메르크 주심은 19일 브라질-호주전에서 자신에게 폭언을 한 호주 공격수 해리 큐얼의 징계를 바라는 보고서를 경기 직후 FIFA 징계위원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징계위원회는 이례적으로 보고서에 모순된 점이 있다며 징계를 내리지 않아 메르크 주심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FIFA는 폴 주심을 포함, 포르투갈-네덜란드전에서 4명을 퇴장시킨 발렌틴 이바노프(러시아), 호주-일본의 경기에서 골키퍼 차징을 무시했던 에쌈 알 파타(이집트) 주심 등 오심논란을 일으켰던 일부 심판들을 8강전부터 심판명단에서 제외시키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FIFA 제프 블래터 회장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심판이 옐로카드감” “심판의 자질이 선수들에 비해 형편없다”는 등 비난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심판 수난의 가장 큰 원인은 중계기술의 발전. 독일월드컵이 열리는 12개 경기장에 각각 25대씩 설치된 TV카메라는 시청자들이 심판보다 더 좋은 각도에서, 더 정확하게 경기를 지켜볼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이에 따라 예전 같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오심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심판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기량만큼이나 빠르게 늘고 있는 선수들의 연기력도 심판들에겐 고민이다. 독일월드컵 프란츠 베켄바워 조직위원장은 “살짝 몸에만 닿아도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선수들의 연기력이 심판들의 인생을 괴롭히고 있다”면서 “이번 월드컵에서 사상 최다의 카드가 나온 것은 심판과 선수 모두의 책임”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월드컵 16강전까지 나온 레드카드와 옐로카드는 각각 25장과 310장. 벌써 종전 기록(2002 한일월드컵ㆍ각 22장, 272장)을 갈아치웠다.
심판들은 전통적으로 법관의 법복에서 유래한 검은 유니폼을 입는다. 하지만 오심으로 얼룩진 이번 월드컵을 보면 “다음 월드컵부터는 아예 노란색이나 빨간색 유니폼을 카드 대신 입고 나오라”는 축구팬들의 비아냥거림을 들을 만도 하다.
신재연
기자 poet33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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