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메이지(明治) 유신의 중심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ㆍ1827~1877)는 정한론(征韓論)자가 아니다?
조선 침략을 주장하다 몰락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현의 이토 유이치로(伊藤祐一郞) 지사는 28일 현의회 답변에서 “사이고는 조선에 평화 교섭단을 파견하려 했던 견한론(遣韓論)자”라고 주장했다. 사이고를 “청렴결백한 무욕의 소유자”라고도 평가한 이토 지사는 “교육 현장에서 그의 본래 모습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라며 “교과서에 견한론도 병기하도록 출판사에 요청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토 지사의 이 같은 답변은 가고시마 지역을 중심으로 뿌리깊게 퍼져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이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사이고가 조선과의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견한론자라는 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재평가론자들은 “사이고가 침략적 이미지인 정한론자로 낙인 찍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분개하고 있다.
일본 교과서에는 사이고를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하려 한 정한론자로 기술하고 있다. 당시 쇄국정책을 고집한 조선이 일본의 수교 요구를 번번히 거부하자 사이고 등이 앞장서 ‘정한’을 정부 입장으로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는 내부 불만을 바깥으로 돌리려는 정략적 판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고 돌아온 사절단이 “전쟁보다는 내치를 우선해야 한다”고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고, 사이고는 결국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귀향해 사학을 창설하는 등 인재 양성에 주력했던 사이고는 1877년 정부군에 맞서 세이난(西南)전쟁을 일으켰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메이지 유신의 3걸 중에 한명인 사이고는 존왕양이(尊王攘夷)와 막부(幕府)타도 운동을 주도해 천황 중심의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실현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68년 신 정부군과 구 막부가 충돌한 보신(戊辰)전쟁에도 참여해 도쿠가와(德川)막부의 본거지 에도(江戶)성 무혈입성을 성사시키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도쿄=김철훈 특파원 ch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