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조정래씨의 ‘생애의 문학’에서 원고지 580매는 사소하다. ‘태백산맥’ 1만6,500매, ‘아리랑’ 2만매, ‘한강’ 1만5,000매…, ‘태백산맥’ 이전에 발표한 8권의 소설(중ㆍ단편집, 장편소설)까지 감안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가의 ‘문학의 생애’에서 이번 신작장편 ‘인간 연습’(실천문학사)의 580매는 의미심장하다. 감히 말하건대, ‘인간 연습’은 그의 웅장한 문학세계 전체와 작품 속 숱한 인물들의 생애 전체를 아우르는 네 음절일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넘어 만나는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사랑과 믿음의 세계가 여기에 있다.
소설은 남파 간첩 출신의 30년 장기수 ‘윤혁’ 노인이 강제전향을 당해 출소한 뒤 겪는 이념적ㆍ현실적 혼란과 삶의 허무와 회오의 참담함을, 감옥에서 만난 운동권 출신 사내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위한 대안의 추구를,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꽃’인 어린 고아 남매와의 인연을 통해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회복해가는 노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에는 ‘태백산맥’으로 용공시비에 휘말렸던 작가의 사회주의에 대한 상념들이 작중인물들의 입을 통해 넉넉히 드러난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려고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그 반대로 비인간적으로 운용해왔으니 그런 체제가 망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100쪽), 곧, 마르크스주의가 기본적으로 ‘밥 먹는 철학’이지만 그것을 실현시키지 못해 스스로 몰락하고 말았다는 것이고, 그 ‘철학’은 “이념 이전에 인간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윤혁은 보육원에 들어가 아이들을 위한 새 삶을 시작한다. “오래 살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윤혁에게 고아 아이들은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일깨우는 ‘두 송이 꽃’이다. 작가는 “민족 통일의 전망을 밝게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념의 인간인 윤혁이 ‘인간의 꽃’과 어울려 하나되는 모습을 통해 사상을 넘어서는 미래지향의 희망을 내보이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내 문학에서 분단문제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번 소설을 썼다”고 썼다. 그 분단문제의 매듭으로서의 ‘인간 연습’은, 3년 전 작가가 산문집에서 썼던 대로, 긴 세월의 실패와 모색과 좌절의 끝 없는 되풀이를 통해 인간답게 살고자 한 인간의 ‘연습’이고, 인간만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는 또 한 편의 장편 초고를 완성해둔 상태라고 했다. 대충이나마 내용을 묻자, 2차세계대전 시기의 유럽을 배경으로, 그 전쟁에서 포로가 된 한 한국인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서사의 모티프는 실화에 근거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책은 내년 초에나 낼 생각입니다. 그 역시 이념 너머의 인간의 문제, 인간에 대한 질문이 될 거예요.” 그의 ‘인간 연습’의 무대가 더 넓어질 듯하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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