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는 어디에서 오는가. 공포영화를 본 후 혼자 화장실을 못 가게 만드는 게 나도 저렇게 당할 수 있다는 대상의 무차별성이라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예측불가능성은 고양이 한 마리만 튀어나와도 ‘꺅꺅’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언제 어디서 흉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걱정,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 모르게 진행되는 음험한 음모의 기운이 공포의 질료다.
공포영화 ‘아랑’의 딜레마는 여기서 비롯된다. 아랑설화를 차용한 안상훈 감독의 이 영화는 근래 보기 드물게 탄탄한 드라마 구조를 가졌지만, ‘사필귀정’과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거해 응당 당해야 사람이 당하는 서사구조는 공포의 크기를 최대화해야 할 호러영화로선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다. 불쑥불쑥 나타나는 귀신이 그 순간은 깜짝 놀라게 할지언정 무고한 우리는 해치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안도를 주기 때문이다.
성폭행 피의자를 폭행해 정직됐던 강력반 여형사 민소영(송윤아)은 신참 형사 이현기(이동욱)와 함께 연쇄살인사건의 수사를 맡으며 업무에 복귀한다. 잔인하게 살해된 3명의 남자는 고교 친구 사이로,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단서는 피해자들의 컴퓨터에 떠 있는 민정이란 소녀의 홈페이지뿐. 소영은 이들 세 친구와 민정이 10년 전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밝혀내고 이들의 또 다른 친구인 의사 동민(이종수)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조사를 받던 동민마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눈앞에서 살해된다.
영화는 공포보다는 슬픔으로 흥건하다. 어긋난 사랑의 욕망이 불러온 참화와 성폭행으로 인한 소영과 민정의 상처 등이 여느 드라마보다 탄탄하게 구축된 내러티브에 힘입어 관객의 감정선을 건드린다. 극중 반전도 이야기의 밀도를 촘촘하게 유지하며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민정의 해원(解冤)을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소영의 내면은 잔잔하게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작은 파문을 그린다. 하지만 도망치고 소리지르며 험한 꼴을 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조역이고, 정작 주인공인 소영은 관찰자의 시점으로 물러나 있어 공포가 영화의 중심부를 장악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모든 사건이 해결되고 난 후 마지막 장면. 노트북 모니터에 시선을 뺏기지 말고 키보드 치는 남자의 손목을 유심히 봐야 한다. 결정적 단서인 손목을 클로즈업하지 않은 감독의 잘못이지만, 그 장면을 놓칠 경우 전체 줄거리가 ‘대략 난감’해질 수 있다. 28일 개봉. 15세.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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