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교역에 대한 대표적인 이론에 비교생산비설이 있다. 국내산업보호라는 이름아래 경쟁력이 없는 산업을 보호할 경우 소비자만 손해를 보기 때문에 후진국도 시장을 개방하고 자유무역을 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제일 좋은 나라는 완전히 시장을 개방해 소비자들은 세계 최고의 제품을 가장 싼 값에 사 쓸 수 있는 나라이다. 이 같은 이론을 들을 때마다 나오는 질문은 "그런데 소비자들은 뭘 생산해 돈을 벌어 그 물건들을 사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요즈음 들어 비교생산비설처럼 툭하면 소비자를 들고 나오는 시장주의의 주류경제학 이론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이들 이론들은 소비자는 동시에 기업인, 노동자, 농민 등 생산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 노 대통령의 투정
이와 관련, 노무현 대통령은 지방선거 참패 후 국무회의와 인터넷 포털 사이트 관계자들과 오찬에서 연달아 소비자 주권론을 들고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공무원들의 자기혁신을 강조하면서 "소비자가 지배하는 정치와 소비자가 지배하는 시장을 만드는 게 개혁의 진정한 방향"이라고 말했다.
정치를 시장에 비유하는 잘못된 유행을 흉내 낸 것인데, 유식하게 보이도록 소비자라는 용어로 포장을 해서 그렇지, 쉽게 말해 국민과 유권자들이 지배하는 정치, 민심이 원하는 것이 실현되는 정치가 개혁의 진정한 방향이라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중요한 것은 이 당연한 이야기를 노 대통령이 지방선거 참패이후 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노 대통령의 이 소비자 주권론에 따르면 소비자가 지방선거에서 노 대통령에 대해 사실상 정치적 탄핵을 했으므로 노 대통령은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정치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생각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노 대통령은 그냥 소비자가 아니라 "깨어있는 소비자가 중요"하며 "가치를 지향하는 소비자라야 시장에 가치 있는 상품이 나오게 돼 있고, 가치를 지향하는 유권자라야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권이 탄생하게 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족을 단 것이다. 한 마디로, 소비자인 국민들이 깨어있지 않고 멍청해서 가치를 지향하는 자신의 정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있다는 투정이다.
문제는 멍청한 소비자와 깨어있는 소비자를 어떻게 구별하느냐는 것이다. 2002년 대선, 탄핵과 2004년 총선에서 노 대통령이 승리한 것은 소비자들이 깨어 있었던 것이고 이번 선거 결과는 소비자들이 멍청해졌기 때문인가? 한나라당은 반대로 2002년 대선과 탄핵소동은 소비자인 국민이 멍청해서 잘못된 제품을 충동 구매한 것이고 이후 제품을 3년 써 본 뒤 소비자들이 이제 깨어나 이번 선거에서 불량품을 반품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노 대통령은 "소비자주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언론의 공정한 정보 제공이 중요하다"며 언론의 역할을 강조했다. 또 "정부도 정책홍보를 통해 정책추진력을 높여야 한다"며 국정홍보처와 기획예산처에 국정홍보방송인 한국정책방송(KTV)에 대한 지원확대를 지시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 안이하기 짝이 없는 상황인식
자신과 여당이 그동안 국정운영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주류 언론의 횡포로 소비자인 유권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갖지 못해 선거에서 졌고 따라서 홍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제품은 문제가 없는 데 광고가 문제라는 안이하기 짝이 없는 인식이다.
결국 반성이 아니라 유권자들의 멍청함과 이를 만들어낸 주류언론을 원망하고 홍보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정신을 차리려면 아직도 멀었다. 선거패배에 대한 이 같은 반응은 노 대통령의 평소 스타일을 볼 때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지만 정말 답답하기만 하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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