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이 민간의료보험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새로운 민간의료보험 상품이 출시되면 상당수 가입자들이 건강보험을 외면한 채 민간의료보험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은 급여항목 확대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할 방침이지만 재원확보가 쉽지않다.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70% 수준. 전체 의료비가 100원이라면 국민이 낸 건보 재정으로 70원을 부담한 셈이다. 정부는 2008년까지 보장률을 80%로 끌어 올린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보험료 인상과 국가재정지원을 늘리는 것 외에 뾰쪽한 방법이 없다. 결국 재원은 가입자인 국민들이 부담하게 돼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그렇다고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공적부조인 건강보험을 ‘시장논리’에만 맡겨둘 수도 없다.
최근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의 의료제도개선전문위원회는 정부의 민간의료보험과 국민건강보험간의 역할 설정방안을 제시했다. 원칙적으로 민간의료보험이 국민건강보험의 비급여(보험처리가 되지 않은 질병) 부문 중심으로 운영토록 한다는 것. 그러나 건강보험공단이 독점 관리하고 있는 보험가입자의 사생활과 관계되지 않은 의료관련 기초통계자료를 민간 보험사와 공유하도록 방침을 정했다.
건보공단이 소유해온 의료통계가 민간시장에 풀리면 보험사는 소비자를 흡인하는 신상품을 개발할 수 있다. 결국 공보험과 민간보험간의 치열한 경쟁이 예고된다.
민간의료보험과의 경쟁 격화
올해 말까지는 ‘실손형 민간건강보험’이 출시될 예정이다. 민간의료보험은 사고나 질병발생시 정액보상을 해주는 것이었으나 이 보험은 보험가입자가 실제 부담하게 되는 액수를 급여로 제공하는 것으로 공보험의 ‘사각지역’을 담당한다.
경제부처는 관계자는 “민간의료보험 상품이 건강보험의 약점인 비급여 부문을 보완 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침체한 보험업계가 살아날 수 있고 경제활황에도 효과가 있다” 며 실손형 보험 출시를 지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실손형 보험의 시장출시가 건강보험에는 ‘독(毒)’ 이 될 수 있다는 게 보건복지부와 건보공단의 주장이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공적부조인 건강보험이 보장성 경쟁에서 민간 상품에 뒤질 경우다. 공보험 반대 여론이 커지면서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할 경제적인 형편이 못 되는 서민들은 자연스럽게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기업이 돈을 벌기 위해 판매하는 실손형 보험이 활성화 되면 의료 양극화가 심화하는 부작용이 생긴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실손형 의료보험이 출시되면 필요하지 않은 의료행위를 보험금을 받기 위해 소비하는 일종의 ‘의료쇼핑’ 이 만연, 건강보험가입자들까지 모럴해저드에 빠질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성균관대 의대 사회의학교실과 삼성의료경영연구소의 강성욱 교수 연구팀의 ‘암보험이 암환자의 의료이용에 미치는 영향’ 논문에 따르면 민간보험사의 의료보험에 가입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의료비를 훨씬 많이 쓴다. 이들 연구진은 암환자 4,173명의 의료비를 추적해 민간보험 가입자들의 입원횟수가 연간 2.97회로 비 민간보험가입자 2.3회보다 많다고 밝혔다.
이진석 서울대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는 “공보험을 대신할 것처럼 보이는 실손형의료보험이 보편화되면 건강보험에 대한 신뢰의 틀이 무너지고 이로 인한 의료 양극화가 결국 공보험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민간의료보험의 활성화는 주의해야 할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들어갈 돈은 많고 재정지원 못 늘리고
최근 들어 건강보험의 보장률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6월부터 고가검사인 PET(양전자단층촬영)와 병원식대 등이 급여항목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등록 암환자의 본인부담비율을 10%로 낮추는 등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강화되고 있다. 곧 스켈링, 노인치아보철 등이 추가로 급여대상에 들어갈 계획이다. 하지만 이러한 급여확대는 필연적으로 재정부담을 불러온다.
건강보험법개정으로 지속적으로 국고에서 보험수입액의 20%가량이 지원되지만 앞으로 보장성 강화를 위해 추가적인 재원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대선 정국에 들어서면 정부와 여당이 표를 의식해 보험료율을 올리기는 쉽지 않다.
경실련은 최근 “건강보험 재정안정을 위해 급여액의 25%이상 국고에서 지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실련은 “정부의 재정운영안은 민간의료보험 확대와 의료산업화가 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 공보험의 위상을 지켜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건보재정의 30%인 약제비 절감대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게 보편적인 의견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올 5월 일정 기준의 가격에 비해 효능이 좋은 약만 보험급여를 적용하는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으로의 약가정책을 선포했다. 하지만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 도입의 전망도 불투명하다.
복지부 관계자는 “건보재정의 안정화를 위해선 약제비 절감이 급선무이고 이를 위한 포지티브 리스트 도입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말했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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