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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에르네스토 사바토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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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에르네스토 사바토 '터널'

입력
2006.06.26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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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든 어둡고 쓸쓸한 터널 하나가 있었다. 내 터널이었다.”

이 ‘어둡고 쓸쓸한’ 제사(題詞)을 얹은, 아르헨티나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95)의 소설 ‘터널’(조구호 옮김, 이룸, 9,700원)은 한 살인자의 고백록(참회록이 아니라)이다. 자신의 생의 극적인 한 국면- 연애의 시작과 경과와 종말의 고백.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바로 마리아 이리바르네를 죽인 화가 후안 파블로 카스텔이라고만 말하면 충분할 것이다.”(9쪽)

‘나’(카스텔)는 38살의 꽤 이름난 화가다. “인간 자체를 혐오하고” 세상에 적대적이다. 냉소적이고 소심하고 괴팍하다. 그의 고독은 자초한 것이며, 그 고독을 불편해 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에 홀로 있다는 그런 느낌은 어떤 오만한 우월 의식과 뒤섞여 나타나는 법”(153쪽)이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사랑이 찾아온다. 전시회 개막식장. 작품을 두고 온갖 찬사를 주절대는 ‘우둔한 속물들’(미술평론가)과 달리, ‘그 여자’는 말 없는 응시로 ‘나’의 작품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를 드러낸다.

“처절하고 절대적인 고독”을 암시하는 그림 속 사소한 한 장면에의 깊은 시선. ‘나’는 그녀에게서 “그녀가 세상 전체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확신”을, 그러면서 ‘나’의 그림과 전면적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을 얻는다. ‘내’가 “(전 재산을) 복권의 특정 번호에 모조리 걸어버릴 때”(20쪽)와 같은 두려움과 초조한 욕망 사이에서 망설이는 새, 그녀는 전시장을 떠나 군중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소설은, ‘내’가 그녀를 극적으로 다시 만나 사랑하며 좌절하는, 긴 방황의 과정을 심리소설의 그것처럼 그려나간다.

‘나’는 자신과 타인의 행위와 말을 분석하는 버릇이 있다. 아주 단순한 행위조차 “그 밑바탕에는 거의 항상 아주 복잡한 동인들이 있”다고 믿으며, 그 표면과 이면이 논리적으로 이어질 때에야 수긍한다. 그런 ‘나’에게 그녀의 말과 행위는 의문투성이다.

미혼인 줄 알았는데 유부녀이고, 관계를 진전시키는 데 중요한 의미를 담은 질문을 해도 ‘그게 뭐 중요하냐’며 얼버무리기 일쑤다. 그녀의 말과 표정, 징후, 낌새…, 거듭되면서 심화하는 ‘미묘하고 새로운 의혹’(질투를 충동하는 도발)들 속에서 나의 내면은 ‘열정적인 사랑’과 ‘격렬한 증오’ 사이, 희망과 절망 사이, ‘나’와 ‘또 다른 나’로 분열하는 그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방황한다.

“내 의식의 한 부분이 나에게 아름다운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동안, 다른 부분은 그 행위를 사기니 위선이니 거짓 관대함이니 하면서 고발한다.… 한 부분이 나더러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는 동안 다른 부분은 세상의 추악함과 행복감의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내게 보여준다.”(149쪽)

완전한 결합을 갈망했으나 그 갈망의 가망 없음에 절망한 ‘나’는 자신의 슬픔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뚫을 수 없는 유리벽 뒤의 그녀, 볼 수는 있어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 평행으로 이어지는 ‘터널’의 사랑, 아니 넓고 자유로운 세계의 그녀와 터널 속의 ‘나’의 사랑(252~256쪽), 그리고 파국(살해)…. 끝내 참회하지 않는 이 고독하고 오만한 현대인은 스스로를 ‘추리와 상상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지옥’(259쪽)속에 가둔다. 소설은 “이 지옥의 벽들은 날이 갈수록 더 밀폐된 상태가 될 것이다”는 음산한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발표(1948년)된 지 근 두 세대 만에 국내에 소개된 이 작품이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읽히는 것은, 이 저주처럼 음산한 전망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나’의 터널은 그렇게 끝없이, 더 깊고 어두운 내면의 미로 속으로….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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