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특집기사를 준비하던 한 프랑스 기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질문은 간단했다. 한국인들에게 월드컵은 과연 무엇인가? 엉겁결에 이루어진 인터뷰라 차근차근 답하지는 못했다.
월드컵 열풍은 중세의 카니발과 같은 한 판 흥겨운 놀이이기도 하지만 자본에 점령당한 채 FTA도 미사일도 사학법도 잊게 만드는 아편이기도 하고, 열광적 애국과 광란의 국가주의가 겹쳐지는 지점이기도 하다는 정도의 답을 내놓은 듯하다.
그런데 하나를 잊고 있었다. 축구를 통해 세계인들의 교류와 화합을 도모한다는 월드컵 자체의 의미를 잊었던 것이다. 구기 경기에는 경쟁과 승부가 존재하지만 적개심과 폭력은 없다. 미국과 중국이 탁구로 문을 열었고 남북한도 종종 축구 농구 시합을 통해 친밀함을 강화한다. 정치적 이벤트라는 비난도 있지만 말이다.
월드컵도 경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최소한 코트디부아르, 트리니다드 토바고 같은 나라 이름을 알게 됐으니, 독일 거리 모습에 좀 더 익숙해졌으니. 축구 경기와 기사 몇 개를 보고 다른 문화를 이해한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래도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만난 토고 사람이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면 월드컵이 준 작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세계인들의 교류와 화합’은 그저 대외적 명분에 그치나 보다. 적어도 우리나라 언론만 보면 그렇다. 지난 15일 중앙일보는 프랑스 축구팀 23명 중 16명이 ‘외인부대’라는 기사를 1면 톱에 실었다. 프랑스령이나 아프리카 이민자 출신이 많아 조직력이 모래알이라는 것이다. 이민 2세까지 외인부대 범주에 넣었으니, 하인스 워드도 미국 NFL 팀의 ‘용병’이란 말인가? 월드컵에 관한 국내 미디어의 지나친 상업화와 기사 과잉에 대한 비판은 이미 충분했으니 반복은 또 다른 과잉 지적일 수 있다. 하지만 월드컵의 명분을 애써 깨뜨리는 이 기사는 ‘새로운’ 충격이다. 동시에, 이 인종적 문화적 역사적 둔감함은 우리나라 미디어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오래된’ 문제이다.
다음 날 문화일보는 기명칼럼을 통해 중앙일보의 이 기사를 인종차별적 시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례라며 비판했다. 그러자 19일자 중앙일보의 기자칼럼은 ‘평등적 개인주의’와 ‘톨레랑스’를 언급하며 프랑스 외인부대(와 축구팀)의 철학과 가치를 강조했다.
“지역 이기주의와 패거리 문화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야말로 이러한 프랑스적 가치가 필요하다는 언급과 함께. 지역주의를 치유할 수 있다면 프랑스 아니라 화성의 가치라도 가져와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출신이 어떻든 충성을 맹세하고 쓸모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가치라면, 모래알 조직이 되는 것을 감수할 만큼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면, 또 주류의 시혜적 관용이 있어야 비로소 비주류가 인정 받을 수 있는 가치관이라면, 그 가치관의 수입에 선뜻 동의하고 싶지 않다.
한국 농촌총각과 결혼한 동남아시아 여성들, 이주노동자들, 혼혈인들,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그들의 2세들이 지역감정이나 패거리문화보다 먼저 생각나기 때문이다. 이들이 국가에 충성하고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 그때서야 겨우 ‘국민’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나마 “단합에는 해가 되지만…”이라는 엉거주춤한 몸짓으로?
거창하게 세계 평화를 논할 필요까지도 없다. 타인(종)에 대한 이해와 공감도 이상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미디어가 세계 제전 이라는 행사를 구실로 구별의 폭력과 편견의 횡포를 휘두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월드컵이 끝난 후 사람들 머릿속의 아프리카가 여전히 가난과 주술의 땅이고 유럽 국가들이 그저 오만한 강국들이라면, 그리고 남미 사람들이 변함없이 공만 잘 차는 이들이라면, 월드컵의 명분과 의의는 남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신문과 방송들에게도 묻고 싶다. 한국인들에게 월드컵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윤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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