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기로 한반도가 후끈하다. 나는 불행히도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의 전설적인 열기를 몸으로 체험하지 못했다. 월드컵이 열렸던 시기에 두메산골에서 영화를 촬영 중이었기 때문이다. 몇 경기는 스태프, 배우들과 숙소에서 함께 응원하긴 했지만, 길거리 응원을 비롯한 노른자위 흥분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 '각본 없는 드라마' 월드컵
4년 전의 소외감을 보상받고자 이번 독일 월드컵은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터라, 개막 후 10여일째 밤낮 가리지 않고 경기 시청에 매달리고 있다. 비록 화장실 간 사이에 골을 넣어버린 이천수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터져 나온 안정환의 골든골을 뒤늦게 뉴스 하이라이트로 봐야 했던 4년 전에 비하면 행복에 겨운 투정이다.
토고전과 프랑스전에서 우리 팀은 선제골을 내주고 역전, 동점에 성공했으니 충분히 드라마틱하다. '각본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야 하는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스포츠 경기의 '각본 없는 드라마'를 접하며 좌절할 때가 많다. 흥미로운 것은 스포츠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실제 경기처럼 감동을 주기 힘들다는 점이다.
야구를 소재로 한 나의 데뷔작 'YMCA야구단'에서 주인공은 2-0으로 뒤진 9회말 투아웃에 홀연히 나타나서 극적인 동점 홈런을 날리는데, 그 장면을 본 관객들의 반응은 대체로 뜨뜻미지근했다. "그럼 그렇지"라거나 "내 저럴 줄 알았어" 하는 식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만일 안정환의 골든골 같은 장면이 영화에 나온다고 해도 현실 속의 축구 관중들과 달리 영화 관객들은 좀처럼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늘 강조되는 것이 개연성과 인과관계인데, 우리가 스포츠 경기에서 감동하는 것은 그런 개연성과 인과관계가 무시되는 순간이다. 극적이되 개연성은 없는, 뒤집어 말하면 개연성 없이 극적인 순간에 최고의 감동을 주는 것이 스포츠다.
물론 그 같은 감동에도 사람의 차원에서 분석할 수 없는 조물주가 개입한 개연성과 인과관계가 분명 내재돼 있겠지만, 유한한 인간이 만들고 유한한 인간이 보는 영화에서 그런 심오한 비밀까지 다루기는 힘든 법이다. 그래서 스포츠 영화 제대로 만들기가 어렵다. 스포츠 영화는 흥행하기 힘들다는 속설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올해는 많은 영화들이 월드컵 기간을 피해 개봉일정을 조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4년 전 월드컵 기간에 개봉한 많은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했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는데 누가 극장에 오겠는가.
아직 월드컵은 3주나 더 남았다. 예기치 못한 극적인 순간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을 것이고, 또 다시 나 같은 창작자들은 하나님의 무한 상상력에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며, 그에 앞서 축구팬들은 열광할 것이다.
그나저나 월드컵을 소재로 한 영화의 장르는 스포츠 영화인가? 오히려 전쟁영화에 가깝지 않을까. 월드컵은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말은 요즘 분위기로는 타당한 표현인 것 같다. 나는 평화주의자지만 이 전쟁만큼은 기꺼이 즐길 의향이 있다. 이제 스위스와의 전쟁이 남았다. 영세중립국이라고 비겨선 안 된다. 대~한민국!
김현석ㆍ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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