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독일철도의 이니셜)에서 이런 일을 하리하고는 생각도 못했소.”
스위스로 향하던 독일초고속열차(ICE)를 이름 모를 역에 세우며 승무원이 던진 말이다. 월드컵때문 ICE가 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은 지난 19일(한국시간). 독일 뮌헨에서 열리는 브라질-호주전을 취재하러 가던 중 피곤해 기차 안에서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갈아탈 역을 놓치고 말았다.
이번 월드컵은 경기시작 최소 1시간30분전에 도착해야 미디어 티켓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시계를 보고 계산을 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다음 역에 내려 돌아온다 해도 목적지까지 도착하면 경시시작 1시간 후가 될 것이 분명했다.
취재를 포기하려는 순간, 승무원이 질문을 해왔다. “월드컵?”이라고 물어온 것이다. 가슴에 달린 미디어카드를 보고는 월드컵취재를 온 기자라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냥 의례적으로 묻는 거겠지 싶어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간 승무원은 10분 뒤, 한 뭉치의 서류와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다. “가장 가까운 간이역에서 기차를 세우기로 했으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간이역에서 뮌헨까지 가는 기차와 시간표를 건내 주는 호의까지 베풀었다.
시간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ICE가 정차역이 아닌 곳에 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원칙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행동을 한다는 독일 아닌가. 하지만 더 놀랄 일은 기차가 간이역에 섰을 때였다. 갑자기 목적지가 아닌 역에 정차하자 승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때 “월드컵 때문에 기차가 섰으니 너무 놀라지 말라”는 애교 넘치는 안내방송이 독일어와 영어로 나왔던 것이다. 이어 “지금 내리는 손님에게 격려의 박수를 부탁한다”는 애교 넘치는 말까지 덧붙여 주었다.
덕분에 되돌아가는 기차가 올 때까지 기자는 손님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받으며 플랫폼에 서 있었다. 승무원이 마지막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월드컵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스위스로 가야 했소.” 이름 모를 한 승무원의 노력과 불편을 기꺼이 감수해준 승객들 덕분에 그날 경기를 무사히 취재할 수 있었다. 이 역시 월드컵이기 때문에 받을 수 있었던 잊지 못할 감동이 아닐까.
도르트문트(독일)=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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