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그라운드를 달리는 축구선수들의 몸놀림은 화려한 예술이고, 온몸을 휘감아 발 끝에서 뿜어나오는 슛은 통쾌한 환희를 일으킨다. 강인한 체력, 현란한 기술, 텔레파시가 통한 듯 한 몸처럼 움직이는 조직력의 총합은 잃어버린 야성을 일깨운다. 축구는 야성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월드컵 현상은 눈에 거슬릴 뿐 아니라 걱정스런 요소까지 보이고 있어 불안하고 불편하다.
● 걱정스러운 국가주의적 환상
6월 12일 히딩크 감독의 호주가 일본에게 0-1로 뒤지고 있던 때 동네 호프집들은 호주를 응원하느라 떠들썩했다. 후반 9분을 남겨두고 동점골이 터진 순간 떠나갈 듯 함성이 솟구쳤다. '대~한민국'. 이 어이없는 연호를 아무도 생뚱맞게 느끼지 않는 분위기다. 히딩크로 인해 호주에 대한 친근감을 갖거나 일본에 대한 감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호주가 대한민국이 될 수는 없다.
이 상황에서 한국인의 국가주의적 성향을 읽는다면 과민한 걸까. 한국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훌륭한 경기를 보여주고, 나아가 승리를 한다면 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축구의 승리를 곧바로 국가의 승리로, 국력의 우월로 연결시키고, 눈물을 흘리며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럽다거나 '한민족의 긍지'를 부르짖는 국익과 애국에 대한 환상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축구가 끝나고 되돌아온 현실의 대한민국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에 휘둘릴 뿐 그리 우월하지 못하고, 한민족의 생활은 아무리 벌어도 살기 힘들 뿐 긍지와는 거리가 멀며, 아이들의 교육현실이나 형편없는 정부정책 때문에 '이민 가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축구 앞에 자랑스럽던 대한민국이 현실에선 암담하고, 부끄러워 벗어버리고 싶은 국적이 되고 만다. 축구경기 종료 휘슬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이 엄청나게 상반되는 환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사람들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한다. 직장에 돌아와 느끼는 '알 수 없는 허탈감'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문제는 '애국에 대한 환상'으로 축구의 승패를 국가의 승패로 직결시키는데 있다. 축구에서 패배의 두려움은 '공동체의 쇠퇴와 패배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등치되고, 실점한 가운데 외치는 '대~한민국'은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로 나아가는데, 파시즘 연구의 대표적 권위자인 로버트 팩스턴은 이와 같은 '강박적 두려움과 순수성의 숭배'를 파시즘의 특징적 요소라고 지적한다. 파시즘은 한마디로 '극단적 급진적 민족주의'로 설명할 수 있는데, 반지성주의, 군사주의적 정치문화는 그 병리적 특징이다.
호주의 역전승에 대해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것이나 '우리는 대한민국이다'라는 전혀 어법에 맞지 않은 구호는 파시즘의 '반지성주의'와 닮아있고, 빨강 이외에는 용납되지 않는 문화적 획일성과 용병술, 전술, 전사, 침투 등 군사용어는 군사주의 정치문화를 연상시킨다.
제 몸하나 간수하지도 못하는 초등학생 때부터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짐했던 한국인들이기에 승패에 흥분하여 '한민족의 긍지'를 외치는 모습에서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자책골을 넣은 수비수 에스코바르를 사살한 콜롬비아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 경기 승패에 '애국' 직결시켜선 안돼
한국 대표팀 중 박주영이 돋보이는 것은 승리에 강박당하지 않고 '그저 축구를 즐길 뿐'이라는 철학 때문이다. 이 당연하고 평범한 생각이 특이하게 보이는 것은 축구를 즐기는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경기의 승패를 국가의 승패로 오인하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자. 한국 대표팀은 자아를 실현하는 축구선수들이지 전쟁을 치르는 '전사'가 아니다. 경기의 승패에 마음껏 광분하더라도 거기에 '애국'을 덧칠하진 말자.
송호창ㆍ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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