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축구는 19세기 후반 영국 상류층의 스포츠로 출발하지만, 이후 역사는 '축구가 곧 세계화이자 세계화가 곧 축구'라는 명제를 낳으며 지구 전체를 관통한다. 대영제국의 힘과 초기 축구지도자의 선교자적 전파 의무감 덕분이라는 해석도 있으나, 이 명제의 본질적 무기이자 이데올로기는 '원시성'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게 하는 직립의 이점을 불허하는, 즉 이성과 진화의 산물인 손을 쓰지 못하게 한 규정이 그것이다. 이로써 럭비와 선을 긋는 축구는 절제와 공격성을 뒤섞으면서 원초적으로 동물적이고 과격하고 고되다.
▦반면 축구는 국가와 민족, 부국과 빈국, 종교와 이념, 인종과 언어에 관계없이 대등하고 정직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에서 총구를 겨누던 영국과 독일 병사들이 경기를 위해 '크리스마스 휴전'을 했는가 하면, 아프가니스탄 테러전쟁 와중에도 주둔군과 현지인 간에 우호와 화해의 가교로 역할했다.
축구가 종종 전쟁과 폭력의 도화선이 되고, 독재권력의 유지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된다는 비난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1년 축구는 노벨평화상 후보반열에까지 올랐다. 세계인을 소통시키는 만국의 언어였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환호와 눈물, 이변과 드라마가 없으면 그건 스포츠가 아니다. 특히 축구는 투혼과 기술, 전략과 용병술, 리더십과 인내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종합예술이다.
독일 월드컵 G조 리그의 최대난적으로 꼽힌 프랑스와의 일전에서 막판 동점골을 넣어 극적 무승부를 연출한 한국팀에 쏟아진 '영웅적' '드라마틱한' '소름끼치는' '경악할 만한' '불굴의' 등의 국내외 언론의 찬사는 경기내용만 보면 솔직히 좀 과하다. 하지만 과잉 내지 한때의 열기라고 해도 4,800만 국민의 꿈과 자존심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국 축구가 이번 월드컵에서 최종적으로 얻을 결실이 무엇이든, 이 시점에서 차분히 생각하고 새겨볼 메시지도 많다. 좁은 시장 및 빈약한 저변 등 열악한 환경과 4강 신화의 심리적 부담을 이겨내고 목표에 성큼 다가선 과정에 우리 사회가 깨우치고 지향해야 할 컨텐츠가 담겨 있다는 얘기다.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인적ㆍ물적 잠재력을 총동원하며,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위기관리능력을 갖추며, 열린 미래를 설계하고 인재와 물산을 키워가는 것이 그것이다. 정치든 경제든 이 메시지를 읽지 못하면 미망(迷妄)에서 헤매게 되고, '토고의 눈물' 같은 축구만 우리에게 남을 뿐이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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