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여기 누워 있지. 이 총소리는 뭐야.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단 말인가.”
경기 연천군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이 19일로 1주기를 맞지만 천원범(23ㆍ당시 일병)씨는 요즘도 악몽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흐려지겠거니 했지만 천씨에게는 1년 전 장면들이 여전히 생생하다. 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동료들과 연락하며 함께 아픔을 달래보고, 기억을 떨치기 위해 악도 써보지만 밤만 되면 떠오르는 악몽 때문에 천씨에게 삶은 삶이 아니다.
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아직도 현장에서 헤매고 있다. 몸은 가족 품으로 돌아왔지만 의식은 슬픔 분노 공포가 가득한 그 GP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생존자들 대부분은 극심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판정을 받고 전역한 뒤 정부로부터 국가유공자로 인정 받아 매월 일정액의 연금도 받고 있지만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사고의 기억을 지우고 직장과 학교로 복귀해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싶지만 당시의 충격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천씨는 범인 김동민 일병과 둘도 없는 동기였기 때문에 감정을 정리하기가 더욱 쉽지 않다. 김 일병과 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천씨는 사고 직후 “한 솥 밥을 먹는 식구 같은 선임 후임 동료들에게 어떻게 총을 겨눌 수 있느냐”며 분노의 감정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대로 김 일병을 보낼 순 없었다. PTSD 판정을 받고 지난해 12월 전역한 천씨는 8명의 동료를 무참히 앗아갔지만 여전히 친구이자 동기인 김 일병을 만나러 경기 이천의 육군교도소를 찾았다. “그런 끔찍한 사고를 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느냐”고 물었지만 김 일병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김 일병을 만난 뒤에도 천씨는 평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생존자들은 사고 충격 때문에 얻은 대인기피증을 아직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초소 근무를 하느라 죽음을 모면한 이강찬(23ㆍ당시 상병)씨는 끔찍한 현장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들다. 1주일에 한번씩 약 처방을 받기 위해 보훈병원을 찾는 게 외출의 전부다. 전화연락을 주고받는 상대도 친한 친구 몇 명으로 극히 제한돼 있다. 생존자대표이기도 한 이 씨의 아버지 이기호(55)씨는 “2학기 복학을 준비 시키고 있지만 학업과 치료가 병행될지 모르겠다”며 걱정했다.
일부 생존자들은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당시 상병이었던 S씨는 군 병원에서 자해를 기도했고 전역 이후에도 몇 차례 자해를 하는 바람에 민간병원에서 치료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생존자들이 서로 아픔을 달래기 위해 간간이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과 달리 S씨는 전역 이후 연락마저 끊겼다.
사건 현장에서 부상을 입은 생존자들의 생활은 더욱 처절하다. 김 일병이 던진 수류탄 파편에 맞은 김유학(23ㆍ당시 상병)씨는 아직도 6개의 파편을 몸 속에 지닌 채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파편 제거 수술을 받을 경우 좌반신 마비 가능성이 있다는 진단에 따라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정부는 생존자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보훈병원 치료도 해주고 있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대부분 국가유공자 7급인 생존자들은 매월 20여만의 보훈연급을 받고 있지만 심각한 경우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도 있어 충분한 피해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보훈병원의 치료도 약물처방에 그쳐 정신과 전문치료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일부 생존자들은 김 일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국가를 상대로 보상이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GP 총기난사사건 생존자들은?
현장에서 GP장을 포함해 8명이 숨지고 28명이 살아 남았다. 병사들 22명은 만기 또는 의병 전역으로 군대를 떠났고 근무일지를 조작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은 부GP장은 강제전역 당했다. 장교 2명과 병사 2명은 다른 부대로 옮겨 군복무를 계속하고 있으며 범인 김 일병은 사형선고를 받고 육군교도소에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김정곤기자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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