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가 발트 뫼르스의, 가상 대륙 ‘차모니아’ 4부작 가운데 지난 해 먼저 나온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둘러본 ‘부흐링족’(순수 독자)이 당신이라면, 그 전작(前作)인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전2권, 이광일 옮김, 들녘)이 번역돼 나왔다는 소식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릴 것이다.
그의 작품의 매력으로 일컬어지는 것들, 풍성하고 웅장한 메타포와 거침없는 냉소, 거기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푸근한 웃음과 묵직한 메시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포 큰 파노라마의 판타지는 ‘…기적’이 ‘…도시’의 그것들을 압도한다.
인간이 기억과 인조기억의 저장공간 그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짐작하기 힘든 시간과 공간 위에 있는‘차모니아’, 그 대륙이 품고 있는 수많은 도시와 종족들, 그들이 엮어내는 삶과 투쟁과 사랑 이야기들이 이 소설의 질료들이다.
이야기는 판타지의 골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식인의 외눈박이 거인들에게 납치된 주인공 ‘루모’가 그들의 소굴에서 스승 ‘스마이크’를 만나 전사(戰士)의 혈통 ‘볼퍼팅’의 비전을 전수 받아 거인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고향 볼퍼팅에서의 행복도 잠시, 혈족 모두가 지하제국으로 끌려가고, 우리의 주인공이 단신 지하세계로 내려간다는 이야기….
뫼르스의 독자라면 알 일이지만, 그 단순한 서사의 골격은 그의 문학에서 곁가지일 뿐이다. 오히려 독자들은 그 골격을 지탱하는 다양한 근육과 잔뼈들, 또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거칠게 펼쳐지는 매혹의 살결에 열광한다.
살아있는 안개의 도시 네벨하임, 완전히 우매하지는 않은 계급과 아주 우매한 계급으로 나누는 블루트쉰크들의 계급 분류법, 나뭇잎 뒤에 숨은 미세도시와 그 도시의 ‘비존재의 미세존재’라 불리는 주민들…. 그는 이 공상의 것들을, 마치 보고 만져본 세상과 존재를 묘사하듯 생생하게 창조해낸다.
신화적인 엄숙함으로 장중하게 흐르는 서사의 어떤 구비에서 만나는 유머, 삶과 사랑, 생명에 대한 애정과 성찰도 있다. 가령, 사형대가 된 평범한 나무가 루모에게 들려주는 이런 인생이야기는 어떤가. “네가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걸 내가 부러워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건 허무한 거야. 내 철학으로는 모든 생명체는 나무야, 알겠니? 누구나 언젠가는 뿌리를 내리게 되지.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푸른곰 선장의 13과 1/2인생’ ‘엔젤과 크레테’에 이어 ‘…기적’과 ‘…도시’로 이어지는 그의 차모니아 4부작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2008년 개봉될 예정이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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