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월드컵으로 들썩댄다. 연극이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어깨춤이자 신명이다. 신명은 억눌림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신난다’는 말은 신을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가둔 신을 ‘태어나게’ 하고, 이를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연극이 추구해 온 것도 이 신명의 사회성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 연극은 신명을 분출하는 마당이 되지 못했다. 근대화 과정에서는 계몽적 메시지를 전하는 강단 노릇을 하느라 신명을 억압했고, 서구 연극에서 이식된 무대 사실주의 원칙은 지난 세기 내내 우리의 신명을 가두어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두고 온 근원 자리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은 어쩌지 못해 몇몇 극단은 이를 회복하고자 애써왔다.
극단 목화, 미추, 연희단거리패 등을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겠다. 이들은 각각 모국어의 천착과 동시대의 역사 의식을 통해 전통극 미학을 부생시키고자 노력했고, 민중적 난장에서부터 양반 문화 안에 갈무리된 신명까지 두루 탐구했으며, 이를 극장 안으로 들여 와 열린마당으로서 신명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 소망들이 쌓여 이제는 제법 튼실한 전통극 미학의 계승 및 현대적 재창조라는 탑을 이루었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신생 극단이 ‘한국 연희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양식화’하겠다는 미학적 포부를 내걸고 웃돌 하나를 얹고자 한다. 극단 우투리의 ‘이리와, 무뚜’가 그것이다(김광림 작, 변정주 연출). 이 극은 공간, 음악, 소리, 움직임, 대사 등 연극의 여러 요소 전반에 걸쳐 우리 전통의 들을거리와 볼거리 유산들을 가져와 서구에 편향된 무대 미학을 보정하려 애쓴다.
우선 극장을 텅 비워 놀이 마당으로 바꾸고, 무대와 객석 사이에 숨어 있던 오케스트라석의 악사들을 불러내 천연덕스레 무대 위에 앉혀 극에 참견하게 했다. 그리고 대사의 의미 전달 기능을 넘어 가락과 정서를 부추기고 곡예, 재담, 몸짓, 장단 등 탈(脫)언어적 요소들을 부각시켰다. 연극의 서사 구조 또한 우리 구술 문화의 대표격인 유래담을 좇는데, ‘광대가 된 삽살개 무뚜’의 탄생담이 극의 줄기를 이룬다.
이들의 이러한 양식 추구는 새내기의 그것처럼 풋풋하다. 그러나 광대 정신의 예찬과 긍정이라는 주제의식은 창단 공연을 의식한 자기 다짐에 머무른 감이 있다. 사회적 갈등의 풀림이 신명이 되는 신명 본연의 원리를 밀어두고, 연행자 자신들의 신명을 푸는 손쉬운 해결을 택했다 할까.
형식 탐구 못지않게 동시대 삶의 문제를 직면하고, 연극과 현실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피의 수혈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18일까지 아룽구지.
극작ㆍ연극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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