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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월드컵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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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월드컵 어록

입력
2006.06.16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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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번이 넘는 패배가 나를 키웠다."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미국과 일본을 꺾은 김인식 감독은 자신의 야구 철학인 '믿음의 야구'는 700번이 넘는 패배에서 비롯됐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의 말은 한동안 한국 국민들을 열광에 빠뜨렸던 WBC 게임 자체보다 훨씬 감동적이었다.

700번의 패배, 말은 쉽지만 700번이 넘는 패배를 견디고 일어설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 한 번만 거꾸러져도 그냥 나앉고 싶은 것이 나약한 우리 모습이다. 김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 12년간 736승 38무 772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는 "처음엔 믿음의 야구 같은 거 몰랐지. (772번의 쓰라린 패배라는) 실패를 통해, 나 혼자 잘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역시 감독은 선수가 잘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게 최고다, 이런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2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일어나 한쪽 다리를 절면서 WBC 대표팀을 이끌었다.

요즘 한국의 피플들을 그래도 살맛나게 만드는 것은 스포츠밖에 없다. 6월에는 WBC에 이어 석 달 만에 월드컵이 벌어지고 있다. 무분별한 일시적 열광일까, 서울시청에서 광화문까지를 뒤덮고 우리 축구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는 수십만의 인파는? 아니라고 본다. 기자는 그 모습에 80년대말 90년대초 최루탄 연기 자욱한 종로 거리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시위대의 모습을 겹쳐본다. 평소에 찌들어 사는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때 되면 일어설 줄 안다. 그들은 행복하고 싶다. 그리고 살아갈 힘을 얻고 싶다.

월드컵은 원래 골잔치, 지금은 돈잔치로 욕 먹고 있지만, 우리를 힘나고 행복하게 하는 말의 성찬이 베풀어지는 말잔치이기도 하다. 선수도 감독도 관중도 경기에서 터지는 한 골 한 골에 웃고 울며 희비가 갈리지만, 그들이 남기는 말은 영원하다. 김인식 감독의 말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처럼, 말을 즐기는 것도 월드컵을 즐기는 또 한 가지 방법이지 싶다.

"공은 둥글다"는 말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2차 세계대전 패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독일에 월드컵 첫 우승을 안겨주며 독일 재건의 국부(國父)로까지 추앙받은 제프 헤르베르거 감독의 말이었다. "공은 둥글다" "경기는 90분 동안 계속된다"는 그의 너무도 당연한 듯한 말은 스포츠뿐 아니라 불굴의 인간정신 그 자체를 상징하는 명언으로 남았다.

히딩크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비행기 안에서 안내책자를 읽은 것 뿐이다"라고 2000년 12월 17일 김포공항에서 입국 기자회견을 했던 그는, 2년 뒤 "나는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럽다"(폴란드 전 승리 후), "선수들이 최선을 다 하는 한 나는 언제나 그들을 보호하고 지지할 것이다"(포르투갈 전 앞두고)라며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보였다.

그의 어록은 저 유명한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역사를 만들어보자"(이탈리아 전 앞두고)로 이어졌다. 이번 독일월드컵에서도 "나는 대한민국의 명예시민이다.

한국을 위해 일본을 반드시 꺾겠다"고 호언하고 그 말대로 일본에 3-1 대역전승을 거둔 히딩크의 마법은 그의 말의 마법이고, 그 마법의 근원은 바로 선수들과 함께 최선을 다한 뒤에 나오는 그의 당당한 자신감이다. 우리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은 그 자신감을 공유하고 싶어서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이번 월드컵을 보고 "유엔은 월드컵이 부럽다"고 했다.

하종오 피플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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