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외과계 전문의인 P원장이 저에게 고충을 털어놨습니다. P원장은 어떤 유명인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이 환자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변 노출을 꺼려하고 여러 가지 특별대우를 요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P원장은 부담스럽게 느껴졌으나 그래도 특별히 잘 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앞서 대단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 수술은 P원장이 오랫동안 전문적으로 시술해오던 것으로 그야말로 눈감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환자를 치료하면서 긴장해서인지 썩 만족스러운 시술이 되지 못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이 ‘VIP 신드롬’이라는 질병의 일면입니다. 환자의 유명세 또는 지위에 의해 의학적인 치료결정이나 결과가 영향을 받게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른바 ‘특별대우’ 때문에 오히려 치료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은어처럼 쓰이기도 하고 징크스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정신과 의사와 같이 환자-의사 관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래 전부터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VIP신드롬은 유명인, 탤런트, 재력가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상당히 겪고 있습니다. 누군가 아는 사람을 통해 직ㆍ간접적으로 부탁하지 않으면 의료진이 관심을 덜 가지거나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을 것 같은 불안감이 VIP 신드롬을 자극합니다.
질병의 치료는 환자 입장에서는 절대절명의 중요한 일입니다. 따라서 고지식하게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여러 방법을 통해 확실한 관심과 대우를 확보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으로도 여겨집니다. 과거에 불친절하고 무책임한 의사를 만나 치료에 불편을 겪은 경험이 있다면 이는 더 심각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VIP신드롬을 환자 본인에게 나쁜 결과를 갖고 오기도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의학적으로 꼭 필요한 부분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들은 신속한 치료를 최우선으로 여기기에 응급실에서 필수적인 초기 선별검사들이 VIP에게 생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들이 진찰을 할 때도 VIP 환자가 부끄러워하거나 불편할 것 같으면 문진이나 신체검사를 건너뛰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진단과 치료에서 중요한 단서를 놓쳐, 결과적으로 치료를 제대로 못하게 하게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특별대우가 지나쳐 환자가 오히려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남들은 며칠이 걸려야 겨우 받을 수 있는 검사들을 어떻게 해서든 하루에 다 끝내도록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는 무리하게 일정을 잡게 되기 때문에 피로한 검사자도 제대로 검사를 할 수 없고, 바쁘게 끌려 다니는 환자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됩니다. 수술 후 통증을 없애기 위해 진통제를 적극적으로 투여하다가 뜻하지 않은 부작용으로 고생을 하는 것과 같은 일도 생깁니다.
의료진도 VIP 환자가 부담스럽습니다. 환자의 유명세, 지위, 권력 또는 환자와의 친분 때문에 의학적인 객관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가장 심각한 부작용입니다. 또한 실수를 두려워해 너무 잘 하려다보니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간혹 무례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VIP에 대해서는 부정적 감정이 생겨 치료에 악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VIP 신드롬은 누구의 잘못이라 따질 수 없는 현상입니다. 좀 지나쳐서 그렇지 제대로 치료받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생긴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의도와 다르게 나쁜 쪽으로 일이 꼬인다면 이를 막을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은 의료진의 각성과 준비가 요구됩니다. VIP가 대하기 어려워도 의학적인 객관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때는 개인이 아닌 팀을 구성해서 의견을 나누며 것도 도움이 됩니다. 간혹 일반 환자와 VIP는 다 똑같다고 해서 VIP 환자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강직한’ 의사들도 보는데, 이것도 반드시 옳지는 않습니다.
의사들은 VIP 환자들의 요구 뒤에 있는 양질의 치료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제대로 읽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통상적으로 요구되어지는 특별대우가 아니더라도 환자들의 바람을 충족시키고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환자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부탁하고 들어가는 것까지는 우리 정서로 보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의료진이 권하는 절차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해 무시하거나 건너뛰도록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의료진을 신뢰하고 따르는 태도를 가져야 치료에 도움이 됩니다.
성대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 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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