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에서 분출된 실망과 분노가 잠시 월드컵 축구대회 열기에 묻혀 있다. 머지 않아 이 열기가 식으면 국민의 정치 관심은 곧 다시 달아오를 것이다. 지방선거로 사망진단을 받은 정권이나, 열린우리당에 대한 비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국민의 정치적 관심은 1년 반 앞으로 다가온 대선 향방을 놓고 한나라당 예비 주자들과 고건 전 총리 진영에 쏠릴 전망이다.
● 지역과 계층의식 벗어나야
이들을 중심으로 짜여질 대선 구도는 대단히 유동적이다. 이미 정치권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에 따른 다양한 정치구도의 변화가 거론되고 있고, 그런 관측 안에서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의 역할도 점쳐진다. 민주화 이후 20년 가까이 그런 정치를 거듭해 온 관성 때문이다.
‘6ㆍ10 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되찾은 이후 네 차례의 대선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한번도 예정되고 안정된 맞대결 구도의 선거를 치러보지 못했다.
야당통합 실패에 따른 3자 대결(1988년), ‘3당 합당’ 여파와 국민당 변수가 겹친 2강1중 선거(93년), DJP연합(98년)과 노무현ㆍ정몽준 후보단일화(2002년)에 이르기까지 유권자의 눈이 어지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 한국 정치의 역동성이든 불안정성이든, 정치권의 주도권이 두드러진다는 특징은 변함이 없다.
정치권이 주도하는 선거구도 재편 전망이나 그에 근거한 다양한 정치 게임 관측은 유권자의 수동성을 전제하고 있다. 유권자들의 지역ㆍ계층의식이 선거의 핵심 요소가 됐던 경험이 그런 전제의 근거가 됐다.
유권자가 이런 의식에 묶여 있는 한 정치권은 언제든 임의적 연대와 단절로 유권자를 몰고 다닐 수 있다. 언제까지 유권자들은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는 대신 식당 주인이 미리 차려놓은 밥상 앞에서 숟가락을 물고 선택을 고민해야 할까.
변화의 조짐은 있다. 5ㆍ31 지방선거는 한국 정치구도의 고정요인으로 여겨져 온 지역ㆍ계층의식에 크게 금이 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유권자들이 이 여세를 몰아 수동적 선택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지도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민주화 20주년을 맞는 내년 대선의 의미는 새로울 것이다. 현실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지도자를 만들어낼 능력이나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예비 후보들 가운데 지금 우리가 요구하는 자질에 가장 근접한 사람을 고르고 그에게 힘을 모아 줄 수는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자질, 어떤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일까. 선거가 국민 의사의 확인이라는 점에서 혹독한 참패를 겪은 여당의 자기반성에서 그 뼈대를 추려볼 수 있다.
김근태 의장은 취임회견에서 민주화 세력이라는 ‘훈장’의 퇴색, 공허한 변혁의 구호보다 실질적 서민경제 회복을 위한 성장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지난 3년 반의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겪으며 형성된 국민적 공감대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발독재와 그 대칭점의 민주화 운동이 낳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나 강력한 추진력이 아니라 국민 다수와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합리적 지도력, 특정 지역ㆍ계층의 이익 고려나 피해의식과 거리를 두고 사회적 중간층의 의사를 존중할 줄 아는 중도 노선, 안정 성장으로 실질적 삶의 향상을 가져올 실용주의적 개혁노선 등이다.
● 합리적 중도개혁 지도력을
아울러 지도자 개인의 정서적 불안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악영향으로 보아 평균적 성장과정을 거치며 교양과 정서적 안정을 갖추었을 것도 요구된다. 한편으로 ‘민주화 세력’의 독점적 정당성은 퇴색했지만, 아직 군사독재의 서슬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서 그 때 어디에 있었느냐는 잣대는 여전한 상대적 힘을 갖는다.
현재 거론되는 예비 후보들 가운데 이런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손학규 경기도 지사다. 그러나 낮은 지지율로 보아 유권자가 적극적 자세를 보이지 않는 한 그는 본선 출발선에도 서기 어렵다. 그것이 우리가 떠안을 불행의 씨앗인지도 모른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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