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에 유혹적인 밤이다. 서대문 네거리에서 서울역 쪽으로 방향을 잡고 횡단보도 앞에 섰다. 저 건너편에 화양극장이 있었다. 화양극장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오래 전 그 근처에 살던 한 남자친구 때문이다. 화양극장에서 ‘씨받이 대소동’이란 영화를 보고 그는 사기라도 당한 듯한 얼굴을 했다. “금싸라기 같은 시간을 냈는데, 대리모에 관한 건전영화더라!” 고거 참 쌤통이었다.
경찰청 앞을 지나 염천교 직전에 또 횡단보도가 있다. 혼자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지만 무섭지 않다. 외지인이라면 이 길에 무섬증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자 혼자 밤길을 걸어도 꽤 안전한 도시가 서울이다. 염천교 아래로 막 기차가 들어서고 있다. 저 철로들 건너 비스듬히 구둣방들이 있었다. 언젠가 그 길을 우연히 지나다 한 가게에서 밤색 구두 한 켤레를 산 적이 있다.
유명 제화점 구두의 반의 반값이면서 튼튼하고 편하고 맵시 있는 구두였다. 유재현의 소설집 ‘난 너무 일찍 온 것일까 늦게 온 것일까’에 실린 단편 ‘염천교’는 그런 구두를 지었던 제화공들의 슬픈 이야기다.
염천교에서 우리 집까지는 오천 칠백 육 걸음이다.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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