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프랑스와 이룬 ‘외규장각 문서의 정기적ㆍ장기적 한국 전시 및 디지털화’ 합의에 대해 문서 반환을 추진해 온 정치권과 학계의 반응은 다소 싸늘한 편이다. 프랑스가 주장해 온 ‘도서 맞교환 전시’라는 ‘인질 잡기’에서 벗어난 점은 진일보한 성과라는 평가지만, 여전히 완전 반환과는 거리가 먼데다 자칫 정기 전시가 완전 반환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9일 정부의 전시 수용을“성과가 아닌, 제 발등에 도끼를 찍은 것”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이 교수는 “정기전시회를 장기간 한다는 것은 약탈된 297권 전부를 여러 차례 전시하려는게 아니라 몇 권씩 찔끔찔끔 나눠서 전시하고 가져가기를 거듭하겠다는 얘기”라며 “프랑스가 국유재산으로 삼은 외규장각 문서가 양국을 오가게 하는 것은 법적으로 프랑스의 것임을 인정, 반환 요청을 스스로 포기하는 꼴이 된다”고 주장했다.
유네스코 총회 등에서 외규장각 문서 반환을 촉구했던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은 “불법 상황의 승인이라는,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는 만큼 전시를 할 경우 정부가 약탈당한 물건, 즉 우리 재산임을 명확히 명시해야 한다”며 “프랑스가 반환에 미동도 않고 있는 만큼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등을 통해서라도 반환을 계속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학계의 한 교수는 “언론들이 이번 협상이 현실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정부의 정식 창구나 사전 협의 등을 거치지 않은 채 프랑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형식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태진 교수는 “이번 합의는 프랑스측이 총리실이나 한국 정부의 정식 반환 협상 창구인 외교부와 사전 논의 없이 갑자기 꺼낸 것을 한 총리가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잘못된 협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이번 합의는 외교부와 사전 조율된 것이 아니다”고 인정하면서“전시와 반환 문제는 별개이며, 양국 정부가 협의 채널을 가동해 논의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접근 자체가 제한됐던 외규장각 문서 내용이 디지털화해 인터넷에서 열람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관련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맞교환 형식을 벗어난 것도 결실로 꼽힌다. 지난 4일 국회의원 31명이 서명한 반환요구 서한을 프랑스에 전달한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은 “미흡하지만 한 발 나아간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정부는 조건 없는 반환이라는 요구를 견지해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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