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하면 한국팀이 져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하겠어? 16강 탈락해야 드라마도 보고, 쇼도 볼 것 아닌가 말야.”
경북 안동에 사는 오모(65ㆍ여)씨는 요즘 TV 보기가 짜증스럽다. 돌리는 채널마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연예인들의 특집 방송이요, 뉴스의 절반 가까이가 “가자 16강”을 외치는 월드컵 일색이기 때문이다. 한국팀 응원하는 마음이야 뒤지지 않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대회를 놓고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어 유일한 소일거리인 TV를 꺼버리기 일쑤다.
월드컵 개막 이후 오씨 같은 사람들은 산 속으로 휴가라도 떠나야 할 것 같다. 토고전이 열리는 13일 지상파 방송3사의 편성표를 보면 정말 여행사에 예약 전화를 걸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SBS가 아침드라마 ‘사랑하고 싶다’ 등을 제외한 21시간 5분을 월드컵 방송으로 채우는 데 맞서 공영방송 KBS1이 19시간 35분간 월드컵 특집방송의 대장정에 나선다. MBC는 시청률 30%를 넘긴 자사 유일의 인기 드라마 ‘주몽’까지 결방하며‘뽀뽀뽀’ 등을 제외한 19시간 35분 동안 월드컵 특집 방송을 내보낸다. 호환(虎患), 마마보다 무섭다는 상업주의의 광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편성표를 짤 수 있을까.
비싼 돈 주고 월드컵 경기 중계권을 산 만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입장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다양한 사회 현안을 균형있게 다뤄야 할 뉴스마저 초등학생도 알 만한 ‘토고전 승리해야 16강 승산’ 등의 상식적 분석을 반복하며 ‘붐업’에 몸이 달아 있는 모습은 정상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다.
한국민이라면 누구나 한국팀의 선전을 기원한다. 다만 “나의 열정을 이용하려는 너의 월드컵에 반대”하는 순수함으로 방송상업주의를 배격할 뿐이다.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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